아기 독수리, 0.35초만에 세상을 뒤집다
시속 160㎞를 ‘꿈의 구속(球速)’으로 부르는 건 다분히 미국식이다. 이게 미국에선 100마일이기 때문이다. 99마일에서 100마일, 두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로 넘어간다는 일종의 한계 돌파 개념이다. 160㎞ 속도 공이 투수 손에서 떨어져 18.44m 거리 포수 글러브까지 들어가는 시간은 0.35초. 타자가 눈으로 보고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미국은 1974년, 일본은 2010년 이 꿈의 구속을 처음 구현했다. 한국은 2023년 4월 12일. 주인공은 프로 2년 차 한화 이글스 소속 문동주(20) 투수다.
지난 19일 대전에서 만난 문동주는 “160㎞ 넘긴 공을 던질 때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며 “경기 중 더그아웃에서 소식을 듣고 ‘더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던져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투구 동작이나 몸 상태가 작년과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다만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신인 시절인 작년엔 포수가 요구하는 공을 무작정 던지기 급급했다. 올해는 스스로 경기 상황을 읽고 상대 타자 반응을 예측하면서 어떤 공을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생각한다는 것. 그는 “마운드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신기하게 공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고교(광주진흥고) 시절 최고 155㎞ 강속구를 구사한 바 있다. 투수 입문을 비교적 늦은 고교 2학년 때 한 게 싱싱한 어깨를 유지한 비결로 꼽힌다. 강한 어깨는 해머 던지기 국가대표 출신인 아버지 문준흠(49) 장흥군청 육상팀 감독에게 물려받았다. 지난겨울 시즌을 준비하면서 웨이트 운동 16가지와 러닝을 섞은 30분짜리 서킷트레이닝을 매일 두 차례 하며 허리와 옆구리 힘을 기르는 데 집중한 것도 효과를 봤다고 한다.
프로 입문 첫해인 지난해엔 13경기 1승 3패, 평균자책점 5.65로 기대에 못 미쳤다. 올해는 달라졌다. 세 차례 선발 등판(1승 1패)에서 16과 3분의 2이닝 동안 단 2점(평균자책점 1.08)만 내줬다. 이닝당 출루 허용률(0.72)은 20일 현재 리그 1위. 강속구 의존도가 높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제구력과 변화구를 적절히 곁들이면서 직구 위력도 배가했다는 평가다. 올해는 마운드에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혼잣말을 많이 한다. 모자에도 ‘혼잣말’이라고 적어놨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같은 긍정적인 말들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문동주를 가르쳤던 지도자들은 올 시즌 활약에 대해 “예견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입단 때부터 그를 지켜본 최원호 한화 2군 감독은 “투구 메커니즘은 고교 때부터 좋았다”며 “프로에서 1년간 더 체계적인 관리를 받은 게 올 시즌 기량 만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작년까지 한화 단장이었던 정민철 MBC스포츠+ 해설위원은 “6~7개월 정도 특별한 교정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잘하던 것을 이어가도록 했다”며 “투구 시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것 정도를 바로잡아줬는데, 변화구와 제구력까지 좋아졌다”고 했다.
160㎞ 투수가 속속 쏟아지는 이웃 일본과 달리 한국엔 아직 ‘파이어볼러(Fireballer)’가 많지 않다. 그 맨 앞선에 문동주와 안우진(24·키움)이 있다. 안우진은 역대 국내 선수 3위 광속구(158.4㎞) 기록을 갖고 있고, 지난해부터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투수로 성장해 있다. 그 뒤를 문동주가 추격하는 모양새다. 문동주는 “아직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이르다”며 “우진이 형은 투구 스타일은 비슷한데 모든 구종이 제구가 잘된다. 그런 점을 배워서 시즌 끝날 때는 형을 따라잡는 성적을 내고 싶다”고 했다.
야구계 관심은 그가 선동열·최동원·류현진에 버금가는 한국 야구사 최고 투수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느냐다. 정민철 위원은 “구위는 이미 안우진과 함께 국내 최고 레벨”이라며 “류현진처럼 같은 구종도 강약을 조절하면서 던질 수 있다면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오래 활약하는 투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최원호 감독도 “프로 경험을 더 쌓으면서 자신만의 몸 관리 방법을 터득해나가면 20대 중반이 됐을 때 최고 투수로 우뚝 설 수 있다”고 말했다.
문동주는 “한 시즌 15승도 올리고 싶고 언젠가는 퍼펙트게임도 해보고 싶다”면서도 “그런 목표만 생각하면 무리하게 된다. 하루, 한 주, 한 달 목표를 차근차근 이뤄나가며 다치지 않고 시즌 끝까지 꾸준히 던지는 게 목표”라고 했다. 문동주 등 번호는 에이스 투수를 상징하는 1번. 그는 “등번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겠다. 한화 팬들에게 ‘문동주 나오는 날은 팀이 이긴다’는 확신을 주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경기장 밖에서 그는 ‘순둥이’로 통한다. 인사를 잘하고 항상 미소를 짓기 때문. 쉬는 날엔 친구들과 PC방에 놀러가거나 집에서 예능 유튜브를 본다. “잔인한 장면이 나올까 무서워서 영화나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대전=김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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