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거짓말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그들(권력자들)이 거짓말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1971년 워싱턴포스트가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에서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백악관은 기밀 문서를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를 고소했지만, 결국 대법원은 언론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권력을 쥔 이들의 거짓말은 탄로 났다.
이처럼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신성시하는 나라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는 미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여겨진다. 거짓이 아닌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선 공인에 대해 일부 틀린 정보를 보도하더라도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가 입증되지 않는 한 명예훼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미국에서 지난 18일(현지 시각)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2020년 미국 대선에 대해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수차례 보도했던 폭스사(社)가 투·개표기 제조 업체 도미니언에 1조원에 달하는 돈을 물어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미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개된 합의금 중 가장 큰 금액이다.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온 미국에서 언론 보도 관련 재판이 이처럼 거액의 배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이번 소송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승리한 2020년 11월 미 대선이 끝난 후 폭스뉴스가 보도한 음모론에서 시작됐다. 폭스뉴스는 “도미니언이 바이든의 당선을 위해 투표 결과를 조작했을 수 있다”는 내용을 잇달아 내보냈다. 지난 대선에서 전국 50주 중 28주에 투·개표기를 제공한 도미니언은 폭스뉴스의 허위 보도로 자사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됐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피고인 폭스 측은 자신들의 보도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며 이번 소송을 두고 “수정헌법 1조에 대한 공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폭스뉴스가 보도 내용이 허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송을 내보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판세가 불리해지자, 폭스는 합의로 재판을 마무리하는 쪽을 택했다.
폭스뉴스의 거짓 보도는 도미니언의 명예뿐만 아니라 미 민주주의까지 훼손시켰다. 폭스뉴스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채질하자, 패배를 부정하던 트럼프 지지층 사이에서 대선 불복 기조가 확산했다. 이는 이듬해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의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2020년 대선을 전후로 미국 사회는 온갖 가짜 뉴스로 몸살을 앓았다.
폭스 소송과 1·6 사태가 전하는 교훈은 명확하다. 누군가는 코웃음 칠 ‘틀린 진실’은 의회를 부술 정도로 힘이 셌다. 좌건 우건 가짜 뉴스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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