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식물은 영리하다
어릴 적 읽은 이야기 한 토막. 한 아이가 과자 가게를 하는 친척 집에 갔다. 마음껏 집어먹으렴. 아이는 가만있었다. 무언가 생각이 있는 눈치였다. 괜찮아, 실컷 먹으래도. 그래도 잠자코 있었다. 녀석, 체면을 차리기는, 옜다. 아저씨가 한 움큼 집어주었다. 얼른 윗도리를 보자기처럼 벌리는 아이의 입가에 실룩실룩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고사리만 한 제 손보다는 포클레인 같은 아저씨의 손에 과자가 훨씬 많이 집힌다는 것을 아이는 진즉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른의 손을 빌려 원하는 바를 이룬 그 아이는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궁리 사무실에는 식물이 많다. 모두들 화분에 담겨 있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친구가 와서 말했다. 야, 온통 식물들의 감옥이군. 고문 좀 고만해라. 무슨 대꾸를 해야겠는데 아무런 말을 찾지 못했다. 짧은 생각에도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어느 저술업자에게 이 사정을 말했더니 이런 글로 체면을 세워주었다. “저 넓은 땅에서 햇볕 담뿍 받고 자라야 할 꽃과 풀들을 우리 욕심의 작은 그릇에 가둬두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신세도 마찬가지다. 저 푸르른 벌판에서 뛰어놀아야 할 몸이 사각형 방에 갇혀 있질 않겠나. 그러니 화분 속의 친구들아, 사는 게 그러려니 하고 우리 함께 복닥복닥 지내보자.”
많은 눈물이 필요한 사월, 지나가는 봄을 형용하는 말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식물이 드디어 제 세상을 만났군. 지구를 물의 행성이라고 하지만 식물의 행성이라고 해야 함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영화 <아바타>에도 나오듯 바닷속도 온통 식물들의 천하다. 뭍의 모든 마을도 실은 식물이 허용하는 범위까지가 아닌가.
출판사의 형편도 그렇기를 기대하면서 덩굴식물을 많이 키운다. 가끔 물주기를 게을리하면 식물은 축 늘어진다. 아무리 말랐다고 직접 물을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가지나 잎에 뿌리면 나무는 물을 아래로 그냥 흘려보낸다. 나무는 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화분의 흙에 물을 주어야 식물들은 뿌리로 얼른 그 물을 떠 마신다. 식물들은 물이란 벨트와도 같아서 흙을 통과하면서 양분도 실어온다는 점을 잘 안다. 발이 없는 나무들은 어느 꼬마가 어른의 큰 손을 이용했던 것처럼 물을 지휘하여 흙 속의 영양을 알뜰하게 챙겨먹는 것이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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