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국제정치의 본질과 윤석열 정부에 거는 기대
국제정치의 본질적 환경은 정글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은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동맹은 수단이고, 타인의 자비에 나의 생존과 번영을 기댄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보다 사회화되고 규범화된 개인의 삶과 국제정치의 삶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국가의 생존과 주권의 존중을 보장한 20세기적인 국제적 규범이나 규칙은 강대국의 이익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너무나 미약한 기제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한·미 동맹에 의지하여 생존과 번영을 구가해 온 대한민국은 미·중 전략경쟁과 새로운 국제정치 상황의 도래가 대단히 곤혹스럽다.
오랜 기간 서구는 교황만이 신(聖)의 세계와 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교황의 압도적인 권한 아래 세속의 군주들은 위계적인 질서를 수용하였고, 그 안에서 자율을 추구하였다. 마르틴 루터가 개인들도 신의 세계와 접할 수 있다고 선언한 종교혁명이 성공하자 이 위계적인 중세 질서는 무너졌다. 오랜 전쟁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세속의 모든 국가들은 어느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는 지상 최고의 주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각자의 생존은 각자의 몫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세계는 19세기 말까지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 구조였다. 중국의 힘과 문명에 기반한 이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규범이 되었다. 중국은 종갓집처럼 행세했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그들의 내적 권위를 보장해주었다. 이 질서는 청나라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구적인 적자생존의 민족국가 체제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민족국가 체제는 본원적으로 안보 딜레마를 지니고 있고, 국가 간의 갈등을 수반한다. 1·2차 세계대전은 그 단적인 예다. 인류는 그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내재한 세계적인 참극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미국 중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패권과 시장의 확산은 인류 역사의 최정점에 도달한 듯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30년 천하였다. 미국은 중국이라는 도전자의 부상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간 독일, 소련, 일본 등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40%에 도달하는 국가는 반드시 굴복시킨다는 묵언의 법칙은 미국 스스로 야기한 금융위기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은 2021년 미국 GDP의 70%를 넘어섰고, 현재의 발전 속도로 비춰볼 때,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미·중 전략경쟁은 그 결말을 알 수 없는 장기적인 미·중 간 갈등과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을 향한 문을 열었다. 이 과도기적인 시기에 국내에서는 그 대응책으로 한·미 동맹 강화론, 복합외교론, 균형외교론 등이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그 신념과 미래 비전에서 한·미 동맹 강화론에 확고히 서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히 굴욕이라 할 수 있는 대일 외교 개선을 위한 초유의 결단도 이러한 비전과 신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미국이 제시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대결의 두 체제론, 중국이 추진하는 미국 중심, 중국 중심, 그리고 중간지대의 천하삼분론, 러시아가 요구하는 전통 지정학의 이해를 반영하는 4대 영향권론 등 서로 다른 비전들이 각축하면서 합종연횡을 하고 있다.
국제정치 현실은 한국 조야가 쉽사리 수용하는 천하 이분론적인 관점과는 다른 양상이다. 북·중·러는 동맹이 아니다. 그들 나름의 견제와 전략적 이해를 담은 채, 각자도생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국내외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략 주권과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포용하는 듯한 정책기조를 발표하였다. 독일 숄츠 총리는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 직후 수많은 기업인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하여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일본도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결코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실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무역 증대나 에너지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가 흔히 믿고 싶은 고립된 섬나라의 비전을 지닌 국가가 아니었다. 항상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네덜란드. 영국, 독일, 미국 등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왔고, 실리적인 부강책을 추구해왔다. 현재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예와 신의의 나라였다. 명나라에 대한 보은을 중시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었다. 조선 말까지 청나라에 예를 다하고자 했다. 예와 신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 주류 세력들은 나라의 참화와 멸망을 막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에 예와 신의를 다하고자 하는 듯하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여전히 유지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번 도청 사태에서도 미국보다 더 나서서 미국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분열된 세계’라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2022년 보고서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PEW 리서치의 2021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방의 주요 국가들 모두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은 지속하기 어렵다고 믿고 있다. 미국조차도 경제 운용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이 필수적이고, 완전히 절연한 세계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중동에서의 판도는 사우디아라비아-이란 타협에서 엿보이듯 이미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넘어 일대일로의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고 있다. 분명한 것은 21세기 미·중 모두 강대국으로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극심하게 요동치는 세계,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에서는 믿음보다는 정확한 분석과 유연하고 기민한 대응 역량이 더 국익에 부합한다. 전통적인 정치 현실주의의 ‘세력균형 정책’이나, 스테픈 월트(Stephen Walt)가 제안하는 ‘위협에 대한 균형정책’으론 부족하다. 환상과 기대를 최대한 배제한 ‘이익의 균형’이라는 목표를 갖고, 실질적 성과를 가져와야 한다. 극적인 대일관계 개선 정책과 미국 국빈방문은 이러한 결실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적 비전과 결단성을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4차 산업혁명에서 한국의 생존 공간 확보, 북핵 위협에 대한 군사적 대응방안 마련, 공영의 입장에서 일본과 제7광구 협상 타결, 중국 및 러시아와의 충돌 억제와 관리가 모두 그 국가 이익에 속하는 실리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결실의 여부에 따라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미중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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