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K사극’의 퓨전화 경향과 현주소

김선영 기자 2023. 4. 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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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퓨전사극 <조선변호사> MBC 제공

국내 퓨전사극의 원조라 불리는 MBC <다모>(2003)의 성공 이후, 사극의 퓨전화는 완전히 주류로 자리 잡은 현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극의 퓨전화를 넘어 판타지화가 부쩍 두드러지고 있다. 초자연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본격 판타지 장르가 아니더라도, 가상의 시대를 내세운 작품들이 점점 증가하는 양상이다. 실제로 올해 방영된 사극 가운데 실제 왕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다.

김선영 TV평론가

지난 1월 종영된 <환혼>(tvN)은 “역사에도,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이었고, 같은 달 종영된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MBC)은 아예 평행우주 세계관을 내세운 드라마였다. 지난 11일 종영한 <청춘월담>(tvN), 현재 방영 중인 <꽃선비 열애사>(SBS), <조선 변호사>(MBC) 등 세 작품은 전부 가상의 왕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극의 퓨전화 심화 현상에는 드라마계 전반의 복합장르화 경향,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화법을 내세운 웹 콘텐츠 각색의 증가, 젊은 시청층 유입 유도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무엇보다 결정적 요인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략적 변화다. 2016년, 좀비 아포칼립스의 배경을 조선으로 옮긴 <킹덤>(넷플릭스)과 정통 사극은 아니어도 전통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깨비>(tvN)가 K사극의 글로벌 흥행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아스달 연대기>(tvN), <조선구마사>(SBS)와 같은 재난급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K사극은 ‘한국형 판타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며 꾸준히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려오고 있다.

사극의 퓨전화 현상에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지평을 넓힌다는 호평과 역사를 색다른 배경을 위한 단조로운 병풍으로 사용한다는 비판이 언제나 동시에 존재해왔다. 문제는 글로벌 시청층을 겨냥한 퓨전화 경향이 심화하면서, 그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같은 작품은 흔히 ‘로판’이라 불리는 웹소설의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더 가까운 화법을 보여준다. 공식 소개에서부터 사극이 아닌 ‘궁궐사기극’을 표방하며, 왕과 궁녀가 수라상 앞에 나란히 앉아 먹방 대결을 펼치거나 궁녀가 왕과의 키스신을 주도하는 등 옷만 바꿔 입은 현대 로맨틱 코미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장면들이 연속해서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가 탈맥락화되고 장르적 쾌감을 위한 배경으로만 머무는 이야기들을 과연 퓨전‘사극’으로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변호사>처럼 퓨전사극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미덕과 방향성에 대해 환기시켜주는 작품도 존재한다. 오늘의 변호사에 해당하는 외지부 강한수(우도환)가 힘없는 백성들을 대신해 기록적인 승소를 이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활극에 해당한다. 비록 가상의 왕조를 배경으로 내세워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으나, 고증을 무시하고 판타지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근간 위에서 유연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퓨전사극의 좋은 예다.

실제로 <조선변호사>가 모티브로 하는 것은 조선의 근간이 된 법전 ‘경국대전’이며, 아직 법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시대에 초법적 힘을 휘두르는 부패 권력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극의 중심이다. 이에 따라 외지부를 참신한 소재로만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간의 사극이 제대로 다룬 적 없었던 조선의 법 제도를 조명함으로써 ‘보수적인 유교의 나라였지만 동시에 여성과 노비의 소송이 가능했던 나라 조선’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시청자들은 천재적 변호 실력을 지닌 강한수의 활약을 엿보며 법정활극의 장르적 재미를 만끽하면서도, 당시의 조선에 투영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논리가 여전히 통용되는 지금의 부조리한 현실까지 문제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변호사>는 현재의 K사극이 ‘한국형 판타지’로 글로벌한 인기를 얻고 있는 사이 놓치고 있는 핵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사극은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상으로 역사를 재해석할 때 더 많은 공감을 살 수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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