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된 63살 어부와 나…중요한 건 ‘계속 하는 마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임승수와 도쿠나가 ‘무용한 열정’으로 이룬 기적
공대 출신 저술가, 김 양식 직업 있지만 꾸준히 브람스·리스트 곡 연습
다 큰 어른이 악기를 배울 때의 고난과 해결책을 다룬 단행본 <악기 연습하기 싫을 때 읽는 책>이 있다. 미국인 기타리스트 지은이 톰 히니는 어른이 악기 연습을 할 때는 가족이나 직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돼 있다고 말한다. ‘내가 이걸 한다고 얼마나 더 잘할 수 있게 될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말하자면 ‘현타’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두 중년 남성 아마추어 연주자들이야말로 ‘피아노 쳐서 뭐 하나’ 싶은 ‘현타’를 넘고 또 넘은 사람들이다. 한 명은 공과대학 출신의 저술가, 또 한 명은 한평생 김 양식을 해온 ‘바다 사나이’다.
매일같이 집구석에서 피아노를 독학해온 이 남자들. 뜻밖에도 매끄러운 그들의 연주를 들은 청중은 감동에 겨워 갈채를 보내지만, 가족은 이렇게 말하기 일쑤다. “아빠, 시끄러워 책을 못 읽겠어!” “여보, 또 그 곡이야? 지겹다 지겨워!”
수백, 수천 번 같은 주파수로 흔들려왔을 가족들 고막의 괴로움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기에 이 방구석 연주자들은 불평을 견디고 또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순간이 찾아온다. 한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던 피아니스트와 함께 무대에 서는 영광을 얻어 눈물을 펑펑 흘렸고, 또 한 사람은 청중 70명 앞에서 ‘억’ 소리 나는 꿈의 피아노, 스타인웨이를 연주했다.
브람스냐 리스트냐… ‘인생곡’ 죽어라 친다
한국의 임승수(48) 작가는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전기·컴퓨터공학부에서 반도체소자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벤처기업에서 5년간 연구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20대 시절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끝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고 생계형 전업 작가가 됐다. 2008년 임 작가가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지금까지 36쇄를 찍었고, 5만 부 가까이 팔렸다.
그가 최근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펴냈다. ‘한 중년 남성 생계형 사회과학 저술가의 방구석 피아노 연습기’라 설명하고 말기엔 아쉬움이 있다. 임 작가는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의 정확한 음을 고증하려 왜곡되지 않은 원전 악보로 유명한 독일 ‘헨레 악보’를 사고, 국제악보 도서관 프로젝트 사이트에서 악보 파일을 내려받았다. 곡에 숨은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려 치밀하게 곡을 분석하고, 가끔 전문가 레슨까지 받으며 기량을 향상시켰다.
임 작가는 2023년 4월13일 저녁 서울 서초구 스타인웨이홀에서 열린, 책 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에서 브람스 인터메조, 슈베르트 즉흥곡, 쇼팽 왈츠를 연주했다. 행사장의 객석은 70석이었지만 신청자가 1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사실 임 작가는 프로 음악가가 될 뻔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을 공부하면서 예술고등학교 진학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음악가의 삶이 녹록지 않음을 미리 깨닫고 일찌감치 ‘전향’했다.
결혼 뒤 아이에게 멋진 아빠가 돼야겠다 결심하고 다시 피아노를 시작한 때가 2010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곡’으로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를 꼽는다. 연주 시간은 5분 남짓이지만 치명적이리만치 아름답고 낭만적인 곡이라 드라마 <밀회>, 영화 <색, 계> 등에서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평생 짝사랑한 클라라 슈만에 대한 수십 년간의 순애보와 회한을 담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임 작가는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잘 치고 싶은 곡”이라고 말한다.
바다 건너 일본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도쿠나가 요시아키(63). 규슈 북서부 사가현에서 태어난 이 바다 사나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 양식을 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유일한 취미인 파친코를 즐기고 일본 전통가요 엔카를 듣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서양 고전음악인 클래식은 아예 남의 세계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운명이 다가왔다. 텔레비전에서 60대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이 연주하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듣게 된 것이다. 중년 어부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등학교 때 만나 결혼한 아내는 음악대학을 나온 피아노 강사다. 아내에게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는 단호하게 “절대 무리!”라고 말했다. 피아노라곤 쳐본 적이 없는 52살 어부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는 유튜브에서 기적 같은 콘텐츠를 만났다. 음에 맞춰 건반에 불이 들어오는 <라 캄파넬라> 연주 영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부터 건반 하나하나를 독학으로 익혔다. 하루 6~8시간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 연습하며 마침내 <라 캄파넬라>를 암보해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피아노 연습·연주 영상은 유튜브로 세계에 퍼졌고, 도쿠나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적인 연주자가 됐다.
어부와 작가, ‘방구석 연주자’들의 편지 교환
성격이 느긋하지 못한 임 작가는 책이 나오자마자 도쿠나가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한국 독자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 동호회 게시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선생님의 자료는 일본어밖에 없어 이 편지를 씁니다. 후지코 헤밍님의 연주를 듣고 느낌이 어땠길래 그 큰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임승수)
어부도 어지간히 성격이 급한지, 냉큼 답신을 보냈다.
“반갑습니다. 후지코 헤밍의 <라 캄파넬라>를 들었을 때, 전혀 관심이 없었던 클래식 음악이었지만 난생처음 감동을 느끼며 눈물이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52살이나 되었는데, 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졌습니다. 이 어려운 <라 캄파넬라>를 칠 수 있게 되면 저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도쿠나가 요시아키)
어부와 작가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의견을 주고받으며 음악과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도쿠나가 선생님, 답신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고 완주하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바흐의 바이올린 곡을 부소니가 피아노로 편곡한 <샤콘느>지요. 나름 꾸준히 연습했지만 지금 내 연주 실력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해 연습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어렵다는 곡을 연습할 수 있었나요?”(임승수)
“악보를 못 읽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팔도 아팠어요. 어부로 일했기 때문에 완력은 자신이 있었지만 피아노를 칠 때 사용하는 근육은 달랐어요. 하루에 6~8시간을 연습하다보니 건초염과 팔 통증이 심해 매일 밤 팔에다 찜질해야 잘 수 있을 정도였죠.”(도쿠나가 요시아키)
임 작가는 피아노와 음악을 좋아하는 진심을 글로 표현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책을 썼다. 도쿠나가가 자신의 연습 과정을 유튜브에 영상으로 남긴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지금은 많은 일본인이 도쿠나가의 영상을 보고 감동해 응원을 보낸다. 지금도 그는 어부일을 하며 일본 전역에서 초청받아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한 아이가 유치원에서 제 연주를 듣곤 <라 캄파넬라>를 연습해 1년 뒤 제 앞에서 능숙하게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일본 전역의 피아노학원 선생님들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있는데, 많은 분이 제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어요!”(도쿠나가 요시아키)
두 남자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미래
미국 피보디음악대학 예비학교에 출강 중인 피아니스트 임정연은 신간 <피아노 시작하는 법>에서 ‘피아노에 앉는 자세, 의자와 피아노의 거리, 팔 위치, 손 모양 중 하나만 어긋나도 몸이 긴장하기 쉽고 테크닉 향상에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임 작가 또한 “어깨에 힘 빼는 방법을 극적으로 터득한 때가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힘 빼기는 만고불변 인생의 진리 아닌가.
“두발자전거를 쓰러지지 않게 타게 되는 것과도 같은 찰나적 도약의 순간이었죠. 이뿐만 아니라 제 손으로 직접 좋아하는 곡을 연주했을 때의 짜릿함은 엄청나요. 매일매일 내 소리가 향상되는 걸 경험하는 보람도 있고요. 구도자의 느낌이 있달까요.”(임승수)
도쿠나가는 피아노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기쁜 순간이 이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적을 만났다고 했다.
“수십 번도 더 그만두고 싶었죠. 하지만 후지코 헤밍 피아니스트와 함께 무대에 섰을 때, ‘이게 꿈이라면 깨지 마!’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이렇게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절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던 꿈이 이뤄졌고, 그 꿈이 기적으로 바뀌었고, 기적 너머 또 다른 기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도쿠나가 요시아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적
2024년 여름 일본 전역의 극장에서는 도쿠나가의 삶을 다룬 극영화가 개봉한다. 2022년부터는 폴란드 감독이 그의 김 양식장 작업과 연주회 등 일거수일투족을 뒤쫓으며 다큐멘터리영화를 찍고 있다. 임 작가의 책과 자신의 이야기가 실린 <한겨레21>을 보는 장면도 다큐멘터리에 넣고 싶다고 도쿠나가는 말했다. 2023년 7월엔 유럽으로 건너가 촬영을 이어갈 예정인데, 영화의 피날레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이벤트 장면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 독자님들께도 꿈을 향해 계속 노력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손이 닿는 거리에 기적이 와 있어요. 그 기적을 손에 잡을지 그냥 지나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 작가에게 최종 꿈을 묻자 그는 “피아노 잘 치는 폼 나는 할아버지로 늙고 싶다”고 말했다.
“내 소리가 좋아지면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아요. 왜 치냐건 웃지요.”
(도쿠나가 요시아키 유튜브: https://youtube.com/@you1nana04051 ,
임승수 TV: https://www.youtube.com/@reltih75 )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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