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민족 계몽’ 꿈꾸며 발명학회·과학데이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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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인 1세대였다.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에 자극받았다고 한다.
"고등교육에서 조선인을 차별하는 현실에서 과학이나 기술로 일본을 따라잡는 일은 아득했다. 그러나 발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과학사 연구자 김태호 박사의 견해.
과학기술을 널리 알리는 '과학데이'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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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다]
[나는 역사다] 김용관 | 1897~1967
과학기술인 1세대였다.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마치고 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에 자극받았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와 1924년에 발명학회를 세웠다. 왜 과학학회가 아니라 발명학회였나. 민족운동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고등교육에서 조선인을 차별하는 현실에서 과학이나 기술로 일본을 따라잡는 일은 아득했다. 그러나 발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과학사 연구자 김태호 박사의 견해. 하지만 발명학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8년 세운 고려발명협회도 마찬가지였다.
장백산(長白山)이란 호를 썼던 김용관은 의지가 굳었다. 1932년에 발명학회를 다시 세웠다. 1934년 <과학조선> 잡지 첫 호를 냈다. 독자가 질문을 보내면 김용관이 답을 달았다. 최신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과학소설(SF)도 실었다.
대중 행사도 열었다. 과학기술을 널리 알리는 ‘과학데이’ 행사였다. 날짜는 4월19일. 찰스 다윈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1934년 첫번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해 7월 과학지식보급회를 결성했다. 1935년 두번째 과학데이에는 여운형이 연설했다. 경성 시내에서 군악대와 카퍼레이드를 했다. 과학데이 노래도 있었다. 시인으로 유명한 김억이 가사를 쓰고 홍난파가 가락을 붙였다. 과학 분야 계몽운동에 적극이었던 셈이다.
일제 당국이 좋게 볼 리 없었다. 일제 군국주의가 노골화하던 1938년 다섯번째 과학데이 행사를 마친 김용관은 당국에 붙들려 갔다. 감옥살이를 한 뒤 풀려나서는 만주로 넘어갔다고 한다. 행사도 단체도 흐지부지됐다. “공부시켜 놨더니 콩밥이나 먹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벌인다고 (집안) 어른들의 꾸지람이 심해 어머니는 늘 우시며 사셨지요.” 작은아들 김유중 선생의 회고다.
김용관은 해방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얻었다는 관절통과 당뇨로 1965년부터 앓다가 1967년 세상을 떠났다. 그해 4월21일 한국 정부는 과학기술처를 신설해 이듬해부터 과학의 날로 기념한다. 과학의 날을 4월19일로 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유엔은 2001년 11월10일을 세계 과학의 날로 제정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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