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칼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한겨레 2023. 4. 2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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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칼럼]아닌 게 아니라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국민과 소통 강화를 내세웠지만 대통령실의 전격적인 용산 이전은 여전히 그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 결정이었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해 제2부속실을 폐지한다고 했지만 공공연히 ‘국정의 동반자’로까지 격상되며 나날이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미국이 우크라이나 무기 직접지원과 관련해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대화를 도청한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이 적대국뿐만 아니라 우방국들에 대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정보를 수집해 왔다는 사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사실이 일개 하급 병사 한명에 의해 유출됐다는 사실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미국 쪽 역시 도청 사실보다 유출 사실에 더 예민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우방국에 대한 심각한 주권침해로 명백한 불법적 범죄행위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피해국인 우리는 외교경로를 통해 미국 쪽에 해명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하고, 미국은 당연히 유감의 뜻을 밝히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이는 양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외교적 관례다.

그런데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도청된 내용을 담은 문서가 위조됐다는 둥, 악의 없는 도청이라는 둥, 주권국가 간의 정상적 외교활동은 못할망정 명백한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지 못해 조바심이 난 느낌이다. 지난 3월 일제하 강제동원 배상 문제의 제3자 변제 결정을 통해 상식을 뛰어넘는 친일 행보를 보이더니 이제는 또 어처구니없는 저자세 외교로 일관하고 있다. 이건 친미가 아니라 차라리 걸미(乞美)라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윤석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대일, 대미 편향이 아무리 과한 수준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체면은 좀 차려야 하는데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이번 용산 국가안보실 도청의 주요 내용이 더 상세히 알려지고 주변 정황들이 파악되면서, 미국이 이번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에 155㎜ 포탄 수십만발을 수출, 혹은 대여 형식으로 제공하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고, 살상무기 해외 직접지원이 가져올 후과를 걱정해 이에 반대 뜻을 표명한 김성한 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대통령의 진노를 사서 전격 해임된 것이라는 꽤 설득력 있는 비공식적 후문들이 들려오고 있다. 만일 이 후문들이 사실이라면, 이 도청 사건에 임하는 정부의 이러한 비상식적인 발언과 행보는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어설픈 위장술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안보라인 두 핵심 인사들의 전격 경질이 대통령 방미행사 중 하나로 기획된 블랙핑크의 백악관 공연 준비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실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 터무니없는 소문이야말로 바로 이 진짜 경질 사유를 숨기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흘린 가짜 뉴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니 이처럼 온갖 카더라통신들만 난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아직 공인된 팩트는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 측근들의 거듭된 거짓 해명과 허둥지둥하는 태도들, 그리고 점차 밝혀지고 있는 주변 정황들을 고려해 볼 때 그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만일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는 실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와 아직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러시아군 살상에 사용될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은 러시아와의 외교 위기를 무릅쓰고라도 결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그런 방침을 정했다면 마치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국군을 파견하면서 국민에게 호소했던 것처럼,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호소하고 국회의 협조를 얻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각한 외교 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며, 살상무기의 수출을 억제하고 있는 우리의 국내법(대외무역법 제26조 관련 고시 6조)과도 충돌할 수 있는 이러한 중대한 사안을 핵심 안보라인 교체라는 잡음을 낳으면서까지 왜 이렇게 서둘러 결행하는 것일까. 섣부른 추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이것이 항간에서 회자되듯이 정말로 미국 쪽이 내건 국빈방문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일까. 이렇다면 혹시 그 황당한 강제동원 해법으로 대일관계를 개선한다는 것도 이 국빈방문 조건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아닌 게 아니라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국민과 소통 강화를 내세웠지만 대통령실의 전격적인 용산 이전은 여전히 그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 결정이었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해 제2부속실을 폐지한다고 했지만 공공연히 ‘국정의 동반자’로까지 격상되며 나날이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대통령 부인의 행보를 볼 때 그것은 그야말로 부부 공동통치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은 아니었는지 의심된다.

국민의힘 대표 선출 과정에서 특정 후보에게 가해진 놀랄 만한 노골적 박해가 정책적 결정이 아닌 누군가의 사적인 응징의 결과라는 풍문이 점점 그럴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 정부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별스럽게 강대국에 굴종적이고 매판적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대통령 내외가 미국 국빈방문이라는 호사를 누리기 위해 대일 굴욕외교나 모험적인 대외 무기지원 같은 일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 있을까, 제발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빈다. 원래 나는 정치가 가십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풍문이나 희화나 가십으로 소비되는 순간 정치는 더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구성원들 간의 진지한 각축과 경쟁의 장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극장으로 변질되며 주권자들은 주체의 자리에서 한갓 방관적 구경꾼의 처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제공하는 탈진실의 향연에 포섭되고 중독돼 이처럼 가십적 추론을 진실과 맞바꾸는 데 익숙해져 이러한 풍문과 가십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풍문처럼 들려오는 이 모든 의혹이 정말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검찰독재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우파적 행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확신에 찬 보수주의자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로지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주는 이런저런 이익과 호사들을 누리며 그저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가십이나 농담이어야 할 것들이 곧 국정의 실체가 되는 것이 21세기 초반 한국의 현실이라면? 출범 초부터 도대체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인지 오리무중이었던 이 정권의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이 희비극적인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나는 지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채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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