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434억원' 손해배상, 폭스뉴스의 승리?

정철운 기자 2023. 4. 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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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악의' 판례도 남지 않고 사과 방송도 안 해
'가짜뉴스' 패배로 보이지만 '상업적 성공' 이어갈 듯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폭스뉴스 로고.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28개 주에 투개표기를 공급했던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이 폭스뉴스를 상대로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앞서 미국 사회는 폭스뉴스가 주도하던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인해 2021년 1월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점거해 4명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을 겪는 등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허위정보가 명확했지만, 결론적으로 폭스뉴스는 망하지 않았다.

2021년 1월 도미니언은 허위 보도 명예훼손을 주장하며 美 델라웨어주 법원에 16억 달러(약 2조1197억원)를 청구했다. 도미니언 측은 141페이지 분량의 소장에서 폭스뉴스가 대선 이후 이탈하는 트럼프 지지 시청층을 끌어모으기 위해 앵커 또는 출연자 발언으로 도미니언 투개표기가 투표 내용을 뒤집는 기능을 포함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식의 거짓 주장을 반복해 방송했다고 주장했다. 도미니언은 이에 따라 6억 달러 이상의 이익 손실, 10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 손실을 주장했으며 허위 정보 캠페인 대응에 70만 달러 이상을 썼다고 밝혔다.

폭스뉴스는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지난 18일 7억8750만 달러(약 1조434억원) 배상에 합의했다. 이는 폭스뉴스가 지난해 거둔 매출액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며 세계 역사상 언론사가 명예훼손 소송으로 지급한 합의금 중 최고 액수로 기록될 전망이다. 앞서 폭스뉴스는 도미니언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해달라는 소송에 나섰으나 델라웨어주 상급법원은 청구를 기각하며 “(폭스뉴스 사주인) 루퍼트 머독은 도미니언이 선거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루퍼트 머독은 왜 이 같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에 합의했을까. 영국 가디언은 “도미니언측 변호사들은 92세의 루퍼트 머독을 증언대에 세울 계획이었다”고 전하면서 “도미니언은 머독과 폭스뉴스 관계자들이 허위 사실을 알고도 방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내부 자료를 발굴해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소송을 통해 밝혀진 문자와 이메일에 따르면 폭스의 임원, 진행자 및 프로듀서 중 일부는 트럼프가 홍보한 도미니언의 주장을 의심했지만 방송에서 이를 증폭시킨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폭스 내부에서는 재판 날짜가 다가올수록 증인들의 증언을 두려워했다. 머독은 진술서에서 보도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부에 따르면 경영진이 그의 보도 희망 사항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만약 합의 없이 재판이 이어졌다면, 보도의 '실질적 악의'가 증명돼 사법 리스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방송사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고 판단했을 수 있는 대목들이다. 미국은 대다수 주에서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합의에 따라 폭스뉴스는 사과방송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때문에 도미니언이 유의미한 판례보다 '돈'을 선택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디언은 이번 사건을 두고 “2020년 대선 이후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고 보수적인 지지층과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려는 네트워크의 오랜 의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로 미국과 전 세계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고 평가했으나, 아쉽게도 판례는 남지 않게 되었다.

폭스뉴스는 자사 보도를 통해 “합의하게 되어 기쁘다. 분열을 조장하는 재판 대신 분쟁을 우호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이번 결정을 통해 국가가 이 문제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폭스뉴스는 다른 보도를 통해 “폭스뉴스 디지털이 주요 지표에서 CNN, 뉴욕타임스를 제치고 2023년 1분기 1위 뉴스 브랜드로 선정됐다. 폭스뉴스 디지털은 총 멀티플랫폼 시청 시간 88억 분, 총 멀티플랫폼 조회수 52억 회를 기록하며 두 부문 모두 CNN과 뉴욕타임스를 제쳤다”고 홍보했다. 당장에는 유례없는 배상금을 물게 되었지만, 폭스뉴스의 '상업적 가치'는 오히려 높아지는 모습이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건과 관련, “설리번 판결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뉴스미디어가 실수에 대해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획기적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60년 실린 뉴욕타임스 의견광고를 두고 앨라배마주 경찰국장 설리번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유죄를 인정하고 5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1964년 뉴욕타임스 승소 판결을 내리며 언론사가 허위를 인식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보도했다는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를 공직자 스스로 입증해야 명예훼손 처벌이 가능하다고 판시하며 오늘날까지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강력한 판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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