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 메이커즈] “괜찮아, 경험이야!” 길 위에서 인생을 찾다, 이길보라 코다코리아 대표
4월 20일인 오늘은 장애인의날, 다르게 말하면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소리를 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음성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는 청인. 또, 음성언어가 아닌 손으로 의사 표현을 하고,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농인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코다’가 있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로, 농인의 자녀를 뜻한다. 세상이 귀 기울이지 않았던 코다의 목소리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길보라 그리고 코다코리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길보라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나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오가며 자랐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등을 연출하고 책 <길은 학교다>,<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등을 펴내고 최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저술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전 세계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나를 만든 세계, CODA
글 쓰는 작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영화감독, 비영리단체 대표…. 이길보라를 수식하는 말들은 다양해요. 독자들에게 직접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인 자질이라고 굳게 믿는 이길보라입니다. 저를 표현하는 수식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책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요, 영화로 할 때는 영화감독, 그리고 ‘코다코리아’의 대표로 이야기하면 활동가의 모습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려서부터 농인 엄마, 아빠에게 수어를 배우고 자라면서 ‘코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됐어요. 집에서는 부모님과 수어로 대화하고, 밖에서는 음성언어로 말하며 두 가지 세상을 경험해왔는데요, 이런 세상을 연결하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 글과 영화를 통해 코다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습니다.
흔히 청소년기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험의 시기라고 하잖아요. 혹시 코다라는 정체성을 처음 인지하셨을 때는 언제였나요? 예를 들면, 남들과 ‘다름’을 느꼈던 순간이라고 할까요.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특별한 지점은 없었어요. 태어나서 가장 처음 배운 것이 ‘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수어로 소통하는 게 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라기보다 ‘남들이 우리 엄마, 아빠와 다르구나’라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대부분은 나처럼 수어를 하지 못하고, 음성언어만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거죠. 다만 친구들과 다른 성장기를 겪고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모시고 은행에 가서 제가 대신 대출 상담을 하거나, 어느 날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면 저는 가족이자 보호자, 통역사의 역할을 함께 해야 했어요. 그런 것들이 코다로서의 자각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사실 20대가 되기 전까지는 코다라는 용어를 모르고 지냈어요. 우리나라에 있는 대다수의 코다들이 아마 그럴 거예요. 한 친구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수어를 배우고 “너 같은 아이들을 ‘코다’라고 부른다더라”라고 제게 처음 말해줬어요. 그제서야 저 자신을 코다라고 명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가끔은 오해와 편견을 받을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가령 청각장애인, 벙어리, 귀머거리, 말 못하는 사람과 같은 말들은 우리 엄마, 아빠의 세계를, 그리고 제가 자라온 환경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장애인’이 아니라 수어라는 언어를 가지고 있고, 농문화를 영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죠.
저는 코다여서 기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벅차기도 해요. 근데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내가 ‘사람이어서’ 기쁘고 슬프고 힘들기도 한 것처럼요. 코다이기 때문에 불우하거나 안타까운 삶을 살 거라는 편견도 여전히 존재하죠. 하지만 제 인생은 그렇지 않거든요. 코다라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또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해요. 그래서 저는 그것들을 더 많이 주목하려 해요. 누군가 ‘코다는 힘들고 불쌍할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네’라고 말한다면 그건 바로 편견이 깨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웃음)
우리는 모두 ‘로드스쿨러’
열여덟 살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어요. 타인과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한 용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었고, 동시에 NGO 활동가를 꿈꿨어요. 어릴 때 다큐멘터리 보는 걸 참 좋아했는데요. 저에게 다큐멘터리는 부모님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세상을 대신 보여주는 창과 같았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즈음 넓은 세상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먼저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나서 학교로 돌아와 공부해도 늦지 않다는 마음으로 자퇴 서류를 냈죠. 그 길로 동남아시아 8개국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NGO 기관을 직접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인도의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난민 아이들을 돌보는 탁아소에서 지내면서 NGO 단체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현장에는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앞으로의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렸어요. 제가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에 ‘길 위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 아빠에게 보고 배운 덕분이었어요. 나의 부모님은 뭔가를 배우기 위해 책을 읽거나 TV와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무엇이든 궁금하면 늘 직접 만져보고, 먹어보고,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했던 거예요. 어떻게 보면 농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죠. 그런 부모님이 가진 삶의 철학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세상 공부’를 하면서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진 거네요! 그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왔나요?
우선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고요.(웃음) 기존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도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 또는 학교를 그만두고도 다른 방식의 배움이 가능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에요. 당시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책 <길은 학교다>와 영화 <로드스쿨러>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는데요, 그때가 제 인생의 첫 번째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다른 변곡점은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을 때였어요. 미국의 갤로댓 대학은 공통 언어로 수어를 사용하고, 건물의 모든 공간은 벽이 없이 통유리로 이어져 있어요. 어디서든 수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요. 청인이 아닌 농인이,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가 중심이 되는 농사회가 존재한다는 걸 경험하고 나서 ‘이 이야기를 한국에 펼쳐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만들게 된 중요한 계기였죠. 엄마, 아빠가 살아온 이야기이자 제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장편영화를 제작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많은 관객과 만났어요. 그리고 영화 상영회나 토크 콘서트, 강연 등의 자리에서 만난 코다들과 인연을 맺을 수도 있었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국 코다들이 모인 단체인 ‘코다코리아’를 결성한 이유와도 연결되는 걸까요?
코다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었어요. 코다끼리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하고,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즉, ‘코다 스페이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죠. 그래서 코다코리아를 만들고, 한국 사회에 있는 코다의 이야기를 알리는 활동을 지속해왔어요. 한번은 강연에서 만난 청소년들에게 “코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한 친구가 코다의 존재를 안다고 하더라고요. 놀라웠어요. 사람들이 코다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늘 설명해왔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농인이나 코다라는 단어를 먼저 쓰는 걸 보면 우리들이 작은 것부터 조금씩 천천히 인식을 개선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요.
아무도 안 가는 길을 걷다 보면 가끔 넘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차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술가로 살다 보니 ‘돈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 일을 계속하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아요. 저 또한 마음이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를테면 판매 부수, 관객 수, 조회 수와 같은 숫자들로 인해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상황을 마주하면서부터요. 그렇지만 우리는 꼭 돈만 보고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친구를 사귈 때,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또는 사랑을 할 때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치가 너무 많아요. 제가 속상해하고 있으면 곁에서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힘을 얻어요. 특히 부모님은 제게 ‘괜찮아 경험’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괜찮아. 좋은 경험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거니까!’라고 생각을 되뇌곤 해요.
코다 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 꿈을 찾는 청소년…. 이 땅의 모든 청소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학교 밖에 있는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로드스쿨러’라고 부른 건 아니에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나의 길이다, 나의 학교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가진 힘으로 배움을 실현해가겠다고 결심한다면 누구나 로드스쿨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로드스쿨러인 것이겠지요. 나의 인생에 나를 중심에 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어떻게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갈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장현정 코다코리아 활동가
코다코리아의 활동가로 함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이길보라 대표님의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보고 처음 코다라는 말을 접하게 됐어요. 전에는 청각장애인인 누군가의 딸로 나를 소개했는데 코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 이 말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죠. 그때부터 코다들의 모임에 계속 참석하면서 친분을 쌓아가다가 우리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코다코리아가 하는 사업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코다코리아는 어떤 단체인지 소개해주세요.
청인이 사는 사회와 농인이 사는 사회 중간에는 코다가 자리하고 있어요.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잇는 코다코리아’라는 슬로건은 그래서 탄생한 것이지요. 코다는 농인 부모로부터 수어와 농문화를 습득하고 청사회로부터 음성언어와 청문화를 접하며 자라면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넘나드는데요. 코다코리아는 한국 사회의 코다들만이 가진 고유한 유산과 다문화적인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농인과 코다에 대해 알리고 서로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코다의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시는군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는 어떤 발자취를 남겼나요?
보다 많은 대중에게 코다를 알리기 위해 교안을 만들거나, 코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청소년 코다들을 찾아가서 성인 코다들의 경험담을 공유하기도 하고, 농인 부모님들을 만나 코다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죠. 그중에서도 70명이 넘는 농인과 청인을 한데 모아 행사를 진행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농교육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여러 차례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하고, ‘모-두를 위한 교육 : 수어로 교육받을 권리’라는 제목의 공론장을 열었는데요, 진행자가 수어를 사용하고 곳곳에 여러 명의 수어 통역사를 배치해 사각지대 없이 모두가 수어를 이해했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어요. ‘왜 이제야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했나’ 하는 아쉬움까지 들더라고요.(웃음)
올해 상반기에는 전 세계 코다들이 교류하는 국제적인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고요?
한국의 코다코리아처럼 각국에도 코다 단체와 모임이 있어요.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 국적과 인종을 불문한 다양한 코다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는 ‘코다 국제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CODA International이라는 미국의 비영리 조직이 매해 개최하는 행사인데요, 코다코리아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호스트를 맡아 공동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는 특별히 ‘컬러풀 코다(다채로운 코다)’라는 주제를 기획했는데요, 코다와 관련한 연구를 발표하는 세미나를 열거나 서로의 의견과 생각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앞으로 바라는 점과 꿈꾸는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코다코리아가 더 성장하고 자리 잡게 되면 ‘청소년 코다 캠프’를 꼭 열어보고 싶어요. 나와 비슷한 청소년 코다들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성인이 된 코다들과 한자리에서 만나 어떤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마음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코다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어려움이 없는 사회, 다양함을 존중받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은주 MODU매거진 기자 silver@modu1318.com
글 이은주 · 사진 이동훈 · 자료 제공 코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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