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로 안잡혀 좋았는데…" SK 카카오 'IPO 실패' 청구서 부담 급증
저금리 기조에서 프리IPO·RCPS·CPS 등 자금조달 여파
'장부外 부채' 상환기간 순차적으로 도래…경영권 매각까지 검토
SK스퀘어가 국내 4위 e커머스 플랫폼인 11번가의 지분 매각에 돌입했다. 2018년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H&Q코리아와 국민연금, 새마을금고 등 재무적투자자(FI)로부터 5000억원을 투자 받으며 올해까지 상장(IPO)을 통한 회수를 약속했지만 기한 내 상장에 실패하면서다. 5000억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지분 매각 시나리오를 짜고 있다.
11번가만의 얘기가 아니다. 호황기에 투자자들에 상장을 약속하고 조달한 대규모 투자금들의 만기가 속속 도래하면서 기업들의 상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몸값'이 급락하면서 FI 자금을 갚기 위해 신주를 발행해 자금을 새로 조달하거나, 아예 경영권을 파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5년 전 몸값 포기"
19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11번가의 모회사인 SK스퀘어는 국내외 대형 PEF들을 물밑에서 접촉해 지분 매각 의사를 묻고 있다. 11번가는 2018년 PEF로부터 5000억원을 투자받으며 2조7000억원의 몸값을 인정받았다. 현재 SK스퀘어가 11번가 지분 80.26%를 가지고 있고, 재무적 투자자(FI)가 18.18%를 보유하고 있다.
투자금을 유치할 당시 FI에 약속했던 5년 후 상장 약속은 지키기 어렵게 됐다. 지난해 상장에 한차례 실패했고, 올해도 쉽지 않다. SK 측은 FI들의 투자금에 연복리 3.5%를 더해 지분을 되사올 계획이다.
SK스퀘어 측은 잠재 투자자들에 접촉해 11번가의 기업가치를 2018년보다 낮춰서라도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FI 지분을 매각하고 모자란 자금을 신주 등을 발행해 추가로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같은 금액인 5000억원을 새로운 투자자로부터 조달하면 SK스퀘어의 지분율은 현재보다 대폭 낮아질 전망이다.
2008년 서비스를 시작한 11번가는 1세대 e커머스기업으로 불리지만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11번가만의 독보적인 상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힌다.
11번가는 판매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오픈마켓이다. 11번가에서 활동하는 판매자는 티몬, 위메프 등 대부분 다른 오픈마켓에서도 상품을 팔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선 굳이 11번가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상품 경쟁력이 없다보니 11번가는 최저가 경쟁에 목을 맸다. 할인 쿠폰을 남발해 다른 오픈마켓보다 싸게 상품을 파는 데 집중했다. 결과는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11번가의 지난해 매출은 7890억원으로 전년(5614억원) 대비 40.5% 늘었지만 영업손실은 2021년 694억원에서 지난해 1515억원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났다.
SK스퀘어가 11번가의 몸값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며 매각 작업에 나섰지만 시장에선 원매자를 찾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컬리, 쿠팡, 네이버쇼핑 등을 중심으로 e커머스 생태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11번가의 매력은 더 떨어지고 있다. 11번가와 함께 1세대 e커머스기업으로 불리던 티몬과 위메프, 인터파크(커머스 사업)는 최근 몸값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큐텐에 매각됐다.
장부외 부채 끌어쓴 SK 비상
11번가의 사례처럼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저금리 기조 하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은 상환 방식을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됐다. PEF들에 IPO를 약속하고 지분을 투자받는 프리IPO 및 상환전환우선주(RCPS)·전환우선주(CPS) 발행 등 '장부외 부채'가 계산서로 돌아오면서다.
장부외 부채는 회계상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잡혀 부채비율을 늘리지 않고 대규모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다. IPO 활황기만 해도 공모시장에 회사를 상장하고 투자자 지분을 구주매출로 매각해 깔끔하게 손을 털 수 있었다. 하지만 금리 인상과 함께 유동성이 죄어지며 분위기는 급변했다.
시장에선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장부외 부채를 가장 활발히 활용한 SK그룹의 대처에 주목하고 있다. SK그룹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9개 계열사가 사모펀드(PEF)에서 7조원 가량을 조달해 신사업 투자에 사용했다. SK E&S(3.1조원·KKR), SK온(1.3조원·한투PE 등), SK루브리컨츠(1.1조·IMM PE), SK에코플랜트(1조원·이음PE 등) 등이 대표적이다.
SK스퀘어는 당장 11번가뿐 아니라 지난해 IPO에 실패한 원스토어의 투자금(1000억원) 상환도 대응해야 한다. 자회사 콘텐츠웨이브도 내년 11월까지 상장하지 못하면 2000억원 전환사채(CB)를 되사줘야 한다.
SK에코플랜트는 2020년 종합 환경 폐기물 업체 환경시설관리(옛 EMC홀딩스·1조원) 인수를 시작으로 2021년 삼강엠앤티(4500억원), 지난해 테스(1조2000억원)·제이에이그린(1925억원) 등 12개 주요 친환경·에너지 기업 등에 지분을 사는 데 약 4조원을 투입했다. 인수 자금을 마련하며 늘어난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 FI로부터 유치한 투자금으로 대응했다.
SK E&S도 RCPS를 발행해 KKR로부터 2021년 2조4000억원을 조달한 데 이어 올해 초 7250억원을 더 수혈했다. 상환에 실패하면 알짜 자회사 부산도시가스 등을 매각하는 조건을 보장한 바 있다.
신용평가사도 SK그룹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기업평가는 "프리IPO, RCPS 및 CPS 발행 등 자금조달에 내재된 잠재적 상환 부담과 일정 수준의 부채 성격 등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차입 부담은 장부상 지표 수준보다 다소 높은 상황이라고 판단한다"며 "투자 우선순위에 따른 완급조절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투자사로 넘어간 주도권
카카오도 SK그룹 못지않게 투자자들로부터 활발히 자금을 조달해온 곳으로 꼽힌다. 2017년 TPG컨소시엄으로부터 6500억원을 조달한 카카오모빌리티는 2021년엔 칼라일로부터 1억2500만달러(약 1600억원)을 추가로 유치했다. 카카오모빌리티가 PEF로부터 끌어들인 누적 자금은 1조원에 달한다.
카카오는 FI의 투자금 회수 요청에 지난해 TPG 등 FI의 지분과 카카오 일부 지분을 MBK파트너스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노조 등 내부 구성원의 반대로 포기했다. 카카오의 '중복상장' 여론이 악화하면서 당장 IPO를 추진하기도 요원한 상황이다.
최근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퍼블릭인베스트먼트(PIF)와 싱가포르 국부펀드(GIC)로부터 1조2000억원 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할 때도 주도권은 카카오가 아닌 투자사가 쥐었다. 카카오엔터는 투자금을 유치하면서 수년 내 상장을 통해 투자금 회수를 약속하는 위험방지 조항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웃돈을 지급하고 SM엔터를 인수한 배경으로도 꼽힌다.
신세계그룹은 투자사의 반대로 e커머스 사업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신세계그룹은 2021년 G마켓·옥션을 운영하는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 인수를 추진할 때부터 기존 e커머스 법인인 쓱닷컴(SSG닷컴)과 이 법인을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e커머스사업을 하는 두 회사를 합치면 인력 구조도 효율화되고, 중복 투자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합병은 시작도 못했다. 쓱닷컴에 1조원을 투자한 사모펀드(PEF) 운용사 어피너티컨소시엄이 지분 희석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합병 등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보장받았다. 어퍼니티가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신세계그룹은 달리 손 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LG CNS, CJ CGV(해외법인), JTBC스튜디오 등도 이르면 올해부터 FI의 자금 회수 요청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유동성 파티가 막을 내리면서 올해를 기점으로 그간 유치했던 투자금이 계산서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관/차준호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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