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美·유럽 '협공' 가능성…멀어지는 中 '반도체 굴기'
'집권 3기' 시진핑, 다시 반도체 올인…그러나 '산 넘어 산'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유럽이 '첨단 반도체 자국주의'를 강화하고 나섬으로써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또 다른 도전을 맞게 됐다.
무엇보다 중국은 유럽이 대(對)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과 기술 전수 차단에 주력하는 미국과 협력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18일(현지시간) 430억 유로(한화 약 62조원)를 투입해 EU의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법 시행에 합의했다. 이를 통해 EU는 반도체 산업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2030년까지 민간과 공공에서 EU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EU 반도체법의 골자다.
대만 TSMC와 UMC에 생산을 위탁해온 네덜란드 NXP·독일 인피니언·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회사)가 반도체 생산에 직접 나설 수도 있다.
이외에 네덜란드의 ASML은 반도체 제조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할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EU의 반도체 산업 성장 잠재력은 작지 않다.
EU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의 유럽 공장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눈여겨볼 대목은 EU의 이런 반도체 자국주의화 시도가, 중국의 첨단 반도체 산업 굴기를 겨냥한 미국의 대(對)중국 압박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이다.
EU는 그동안 대중 첨단 반도체 압박에 참여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좀처럼 응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지난 16∼18일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회의에서 핵심 광물은 물론 첨단반도체 등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추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 데서도 EU의 기류가 읽힌다. 영국·프랑스·독일은 G7 회원국이다.
이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보다 대중 압박의 강도를 더 높이고 있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이미 한국·대만·일본과 함께 중국을 뺀 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인 칩4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자국의 퀄컴과 인텔 등은 물론 미국산 부품을 쓰는 외국 기업들의 대중 수출을 금지했다. 중국의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의 대명사인 화웨이가 주요 공격 대상이다. 미국은 5G용 반도체 칩의 대중 수출을 2019년 5월 금지했고 이젠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4G용 수출도 금지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올해 들어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제조 장비 기업인 네덜란드 ASML과 일본 니콘 등이 대중 수출 통제에 동참하도록 양국 정부와 합의를 이미 마쳤다.
첨단 반도체 제품의 중국 유입은 물론 관련 기술이 중국으로 이전되는 걸 싹부터 자르겠다는 심산이다.
현재로선 미국과 EU가 함께 대중 첨단 반도체 제재에 나설 것이라는 명시적인 징후는 없다.
그러나 반도체 자국주의화 과정에서 EU와 중국 간 충돌은 피할 수 없을뿐더러 상황에 따라선 미-EU의 대중 협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근래 독일 정부가 안보상 우려로 중국 화웨이와 ZTE의 부품 사용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화웨이는 각국 통신망에 '백도어'(인증을 받지 않고 망에 침투할 수 있는 수단)를 심어 기밀 정보를 빼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물론 중국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오랜 기간 반도체 굴기를 추진했으면서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시진핑 국가 주석 주도로 다시 '올인'하는 양상이다.
첨단 반도체 자급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중국은 2014년 60조원대 국가 펀드인 '대기금'(공식 명칭은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을 설립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인다는 목표도 세웠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SMIC(中芯國際·중신궈지), 반도체 설계 분야의 칭화유니 계열 UNISOC(쯔광잔루이<紫光展銳>)를 집중 육성했다.
그러나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투자 배분이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고 부정부패도 적지 않아 관련된 고위 당국자와 기업 고위층의 구속이 잇따랐다.
이들 중국기업의 외형은 커졌으나 제대로 된 첨단 반도체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시 주석은 작년 10월 제20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거친 뒤 지난달 초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사실상 반도체 굴기를 다시 선언했다.
시 주석 자신이 공산당 중앙 과학기술위원회와 국무원 과학기술부를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반도체 굴기가 중국에 사활적인 이슈라는 제스처다.
이런 가운데 18일 열린 중국 집적회로(IC) 제조 콘퍼런스에서 중국의 '제조 허브'로 통하는 광둥성에서 총 5천억 위안(약 96조원) 이상 상당 중요 반도체 프로젝트 약 40개가 진행 중이거나 계획됐다는 왕시 광둥성 부성장의 발언이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광둥성이 역내 자동차와 전자제품 생산 증대에 필요한 반도체 수요 증가에 부응하기 위해 자체 반도체 산업을 확충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규제 강화에 대응한 중국 반도체 자립 노력의 일환"이라고 짚었다.
SCMP는 중국의 3월 집적회로(IC·반도체 칩) 생산량이 294억개로 2021년 12월 이후 최다 월간 생산량을 기록했다면서, 이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속에서 중국의 반도체 생산이 회복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앞서 중국의 작년 10월 반도체 생산량은 전년 동월보다 26.7% 급감한 225억개였으며, 이는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97년 이후 월별 수치로 가장 크게 떨어진 수치였다. 작년 10월은 미 상무부가 미국 기업이 특별한 허가 없이 중국 제조업체가 필요로 하는 장비 또는 첨단 반도체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했던 때다.
이 때문에 넘기 힘든 미국발 변수에다 EU의 자국주의화 기세에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산 넘어 산'에 봉착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kji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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