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메이트가 최강 라이벌”…승부는 섭씨 70도 운전석보다 뜨겁다
슈퍼레이스 김재현·정의철
드라이버들이 정의하는 레이싱은 고통이다. ‘레이스의 즐거움’을 묻는 말에 “즐겁지 않다”는 답이 돌아온다.
“차 타기 싫어요. 특히 여름에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싫어요. 어떤 선수든 이런 생각 해봤을 걸요.” (김재현)
섭씨 60∼70도까지 치솟는 스톡카 운전석 안에서 야생마 같은 기계를 어르고 달래며 40분씩 치르는 극한의 경주는 기진맥진하고, 천 분의 일초를 겨루는 압박감은 피를 말린다. 괴롭지만, 이 괴로움이 처음 핸들을 잡은 날의 두근거림과 어우러져 여전히 그들의 청춘을 붙들고 있다.
지난 11일 경기도 용인의 넥센-볼가스 모터스포츠팀 캠프에서 만난 김재현(28)과 정의철(36)도 마찬가지다. 25년 차 드라이버 정의철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 재밌지만, 프로가 되면 매년 성적에 따라 경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지금은 스트레스가 더 크다. (재미는) 잘 마치고 나서의 성취감이지 과정이 재밌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도 1998년 처음 카트 대회에 출전했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배기음, 냄새까지 기억난다”고 한다.
둘은 한국의 대표 모터스포츠 대회인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의 최상위 클래스 삼성화재6000에 출전하는 프로 드라이버다. 올해로 18년 차를 맞은 슈퍼레이스는 총 여덟 라운드로 구성되며 라운드별 순위에 따른 포인트를 합산해 시즌 챔피언(개인·팀·타이어 세 부문)을 가린다. 지난해부터 합을 맞춘 두 선수는 팀 순위(10팀)에서 2위, 개인 순위(21명)에서 2위(김재현)와 6위(정의철)를 기록했다. 말하자면 ‘준우승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 내막은 좀 더 극적이었다.
“작년 챔피언은 한국-아트라스BX 모터스포츠였다. 프로는 결과만 놓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과정을 본다면 시즌을 지배한 건 저희였다고 생각한다.” 정의철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네 번째 챔피언에 등극한 김종겸과 아트라스BX를 끝까지 위협하며 자웅을 겨룬 볼가스 팀은 가장 역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팀이었다. 대기업 후원을 받는 메이저 팀들에 ‘한 방 먹인’ 중소기업 팀이었고, 시즌 내내 실격과 우승을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탄 팀이었다.
늘 사고 다발 레이스였다. 네 번이나 라운드 포디움(우승 2회·준우승 2회)에 오른 김재현은 두 번 차 사고로 완주에 실패했다. 4라운드 챔피언에 올랐던 정의철도 두 번 탈락했다. 특히 6라운드에서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경기 뒤 검수에서 탑승 차량의 무게가 규정치에 미달한 것이 밝혀져 실격됐다. 팀에서 주유량을 잘못 계산한 ‘실수’였다. 김재현은 “실수에도 허용치라는 게 있다. 프로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돌아봤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심기일전한 볼가스는 막판 스퍼트를 발휘, 김재현이 마지막 8라운드 1위를 차지했다. 시즌 종합 점수에서 챔피언 김종겸과 격차는 단 1점. 김재현은 “둘이 실격으로 라운드 네 개를 날리고도 준우승을 한 게 오히려 대단하다”고 했다. 볼가스는 모두를 놀라게 했고 김재현은 지난해 12월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 시상식에서 ‘올해의 드라이버’에 뽑혔다. 2012년 시작된 이 시상식에서 슈퍼레이스 챔피언이 아닌 올해의 드라이버는 딱 두 번 있었는데 모두 김재현(2014·2022)이다.
남은 건 슈퍼레이스 챔피언 왕좌뿐이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차량 트러블로 김재현의 ‘1점 차 준우승’ 접전에 힘을 보태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은 정의철은 스토브리그 기간 체중 감량에 매진하며 생애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9㎏을 빼고 인터뷰 날에도 수척해진 모습으로 “요즘 항상 지쳐있다”라며 웃던 정의철은 “젊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니 체력적으로 더 철저히 준비했다. 정신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했다’는 기댈 곳을 찾는 것도 있다”라고 했다.
볼가스 팀은 지난 시즌을 마치고 넥센타이어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팀 이름이 넥센-볼가스 모터스포츠로 바뀌었다. 이른바 ‘메이저 대기업 후원 팀’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김재현은 “ 넥센 계약을 떠나서 이미 작년에 정의철 선수가 들어오면서 언더도그 위치는 벗어났다 . 성적으로 보여줬다. 우리가 더 잘하면 잘했지, (다른 메이저 팀은) 간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의 드라이빙 실력만큼이나 거침없는 자신감을 표했다 .
둘은 대조적이면서도 조화롭게 경쟁하는 파트너다. 이미 두 번의 시즌 챔피언 경험이 있는 정의철은 세 번째도 “간절하다”고 말하지만, 시즌 챔피언만 못해 본 김재현은 “우승해도 별 감흥 없을 것 같다. 저는 (레이싱을 통해) 저를 잘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라고 한다. 지난 시즌 김재현이 레이스 중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쿨링 수트를 거부하자 정의철도 동참했다. 김재현은 “(입으면) 지는 것 같아서”(?)라고 했고 정의철은 “팀메이트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했다.
올 시즌 넥센-볼가스의 차량에서는 아예 쿨링 수트 연결 장치가 제거됐다. 승부욕을 식힐 생각이 없는 두 드라이버는 오는 22일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첫 질주를 시작한다.
용인/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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