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해서 산책] 그시절 명동, 왕십리, 종로를 소환하다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2023. 4. 20.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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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침반
어느 거리든 갖가지 상징과 기호들로 명멸한다. 을지로에서 야밤의 명동으로 길을 틀었을 때, 첨단의 광고가 빛난다.

봄날의 을지로를 걷는데, 가수 설운도의 40년 전 히트곡이 떠오르더니 혀끝에 맴돌았다. 지금도 건재한 당대의 명가수는 LA올림픽이 열렸던 1984년의 겨울, 절규하듯 도심의 허공에다 외쳤다.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갈까요.

이건 뭐지. 실존적 결단이라도 요구하는 걸까. 맥락을 날린 유행곡의 한 대목이 심상치 않다. 젊은 식도락의 종로, 첨단 유행의 명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계와 회한의 장소라 해야 할까.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청량리로 향하는 행보까지 포함해 1980년대 중반의 히트곡 '나침반'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순간의 결심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는 달라진다. 먹고 놀 것인가, 유행에 빠질 것인가, 추억에 잠길 것인가.

그러나 삭제된 맥락을 회복시키면 '나침반'은 지나간 연애와 그리움의 노래가 된다. 노래의 화자는 떠난 연인을 찾는 중이다. 을지로 모퉁이에 망연히 선 채로 사방팔방을 둘러보며 떠나버린 그 사람을 찾고 있다. 정치적 겨울에도 사랑과 이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그를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미아리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

음표 같은 신호등, 오선지 같은 횡단보도

노래에 잠긴 서울의 거리들은 더 이상 장소도, 공간도 아니다. 빨갛고 파란 신호등 대신 음표가, 반듯한 횡단보도 대신 오선지가 들어선 자리에서 서울의 거리들은 저마다 감성의 메카가 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들은 20년 전, 30년 전 우리들을 사로잡았던 가사와 곡조의 세례를 받는다. 추억의 당대로 진입한다. 시간의 격차가 무의미해지는 산책, 공간의 구분이 무력해지는 행보. 우리는 1980년대의 을지로에서 곧장 1950년대의 왕십리로 날아갈 수도 있다.

1991년 초여름, '호랑나비'의 가수 김흥국은 1959년을 소환했다. 요즈음의 왕십리야 화려한 만남의 장소이지만, 1959년엔 서울의 허름한 외곽이었다. 해방과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그 시절에 허름하지 않은 곳이 따로 있지도 않았지만. 하여튼 그 시절 왕십리는 비 올 때마다 구슬펐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며 술을 마신다.

옛 사랑을 마신다.

그런데 왜 1959년일까. 정설은 없지만, 가수 김흥국의 생년이 1959년이란 거 외엔 '59년 왕십리'란 제목을 설명할 다른 근거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근거야 있건 없건, 구슬픈 밤거리를 감당하기에 1959년은 손색없는 시기였을지 모른다. 남루한 자유당 시절의 끝물이었고, 조만간 혁명과 쿠데타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설운도의 우유부단이 그랬던 것처럼 김흥국의 애수도 정치적인 건 아니었다. 술 때문인지 옛 사랑 때문인지 노래의 화자는 눈물을 삼켰고, 그 동안 왕십리엔 구슬픈 비가 쏟아졌다.

이쯤 해서 서울의 거리들은 우리들을(글을 쓰고 있는 나뿐일지 모르지만 하여튼) 시간적 착란으로 내몬다. 을지로, 종로, 명동, 미아리, 영등포, 왕십리는 저마다 흘러간 시간을 붙잡아 진하게 발효시킨다. 산책의 명목으로 공간을 헤집는 우리들은, 사실은 시간을 헤집는 중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친 김에 을지로에서 멀지 않은 종로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는 순간, 그렇게 종로 2가와 3가 사이 탑골공원에 다다르는 순간 30년의 세월이 역류한다.

모두 우산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흐르지 못하는 세월도 있다

어느 거리든 갖가지 상징과 기호들로 명멸한다. 을지로에서 야밤의 명동으로 길을 틀었을 때, 첨단의 광고와 함께 수줍은 나무도 빛난다.

정태춘, 박은옥의 절창 '92년 장마, 종로에서' 앞에서 우리는 한 시대의 교체를 숙연하게 마음에 새긴다. 1992년 여름의 거리 스케치이지만, 1993년 10월에 나온 노래다. 시인詩人 또는 가객歌客의 호칭이 어울릴 가수 정태춘은 직전 겨울의 대선을 패배로 인식했고(김영삼이 당선된 선거다), 그런 패배감으로 1992년의 장마철을 되새겼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신군부의 정치를 완전히 끝내기 위한 거리 투쟁이 거센 파도처럼 출렁이던 여름 그리고 종로였다. 역사적 평가는 나중 일이지만, 대통령이 된 YS는 대선의 시점에서 노태우와 같은 집권 여당 사람이었으니, '정권 교체'는 명목상으로도 '실패'였다. 정권 교체를 원했던 가객의 입장에서 종로의 파도는 물거품이 됐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랴,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그러나 흐르지 못하는 사람들, 흐르지 못하는 세월도 있어 누군가는 사람 사이를 거스르고 세월을 역행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 역시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중이다. 육신과 생계는 일찌감치 2000년의 경계를 넘어왔는데, 생각과 감성은 수십 년 전에 머문다. 명백한 퇴행이지만 집을 나설 때마다 옛 노래 몇 곡을 소환해 지난 세월들을 뒤섞고 만다.

그렇게 뒤죽박죽된 세월을 축복이라도 해주려나. 이제 곧 벚꽃 흐드러질 봄날의 광화문에 잠시 서서 나는 공간의 사방팔방 아닌, 시대의 사방팔방을 둘러보는 중이다. 방만한 관전의 폼으로 나는, 첨단으로부터의 탈락, 습관이 되어버린 시대착오를 위로하고 변명할 모종의 이유를 찾느라 궁리한다. 그러나 적절한 답은 오지 않는다. 그저 시대착오적인 행복을 느끼는 나 같은 분들이 또 있기를, 사실은 아주 많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든 결국, 저마다의 세기世紀를 사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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