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정치와 비판: '말하는' 마르코스를 위하여

송석랑 목원대 창의교양학부 교수 2023. 4.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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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랑 목원대 창의교양학부 교수

날마다 숱한 매체를 통해 정치논평이 쏟아진다. 이 사태가 우리의 정치적 판단에 작용, 더 나은 정치권력을 선택하게 해줄 수 있다면 기꺼운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 논평들 대부분이, 사실은 전부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권력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두고 대립하는 진영다툼의 수준에서 그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상이 부정적인 것은 정치권력을 두고 다투는 일이라서가 아니다.

어차피 권력을 두고 싸우는 활동이 정치라면 비판을 통해 서로가 더 나은 정치권력임을 주장하며 다투는 일에 복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정치논평의 역할이다. 문제는 '정치권력을 두고 다투는 정치진영'에서가 아닌 '정치권력 자체를 이야기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대립진영의 정치를 비판하는 일이 논지의 대체(大體)가 돼버리는 데 있다.

레이몽 아롱의 진술, 즉 "정치는 지옥의 권력들과 계약을 맺는다. 왜냐하면 권력이란 국가가 합법적으로 독점 사용권을 갖는 폭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의 타당성을 고려하면,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권력 자체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수반하지 않을 경우 정치논평은 정치권력의 이면에 속성으로 들어있는 폭력을 방치, 종국엔 '덜 나쁜' 정치권력의 반복을 용인하는 우(愚)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대립진영에 대한 비판에 머무른 채 자기진영에 대한 비판에 이르지 못할 경우정치논평이 정치의 한 부분으로 축소된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정치권력의 폭력과 내통하는 정치비판의 퇴락을 차단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정치평론은 정치가 놓쳐버린 것들, 즉 '정치적인 것'에 대한 주의력을 회복할 때 이 궁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정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정치의 결함을 경험케 하는 것"으로서, 정치가 혹은 정치권력이 가능성의 이름으로 숨기거나 제거하려 하는 사회적 결핍에 다름 아니다. 어떤 정치진영이 주장하는 가능성의 실현을 두고 다투는 정치에 갇힐 때 정치평론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며, 그 '가능성'이 누락한 것, 즉 그것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실패에 대해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언제부턴가 정치평론이 정치의 현실에서 정치를 대리하는 일에 몰입함으로써 그 본래의 고유한 기능이 상실 내지 상당부분 약화됐다. 그렇게 상실 혹은 약화된 정치평론의 기능을 복구 또는 강화하기 위해선 정치현실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절박함을 억압된 것의 형국으로 반증하는 '정치적인 것'을 비판의 척도로 삼는, 때문에 정치와 거리를 두게 될 비판의 태도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비판은 정치에 대한 중립의 태도에서 나올 양비론과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문제를 정치의 내부에서 절충의 논리로 해소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이면에 놓여있는 결함을 폭로함으로써 해소하려 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다르다. 그러한 비판이 가능하려면 정치평론의 주체는 적어도 정치의 가능성을 내세운 타협과 조작, 거래의 기술이 아닌 정치의 가능성을 불가능성의 자리에서 논박해야 한다.

정치는 불가능성의 저항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부단히 취할 때 성장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에 주목하며 정치의 결핍을 드러내며 인간해방에 복무하는 비판은 숙명적으로 권력에 온전히 편입될 수 없다. 정치 밖에서 '정치적인 것'에 주목할 때 정치논평은 정치에 부여된 권력의 합법적 폭력을 치워나갈 본연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흡사 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든 '사파티스타 해방군의 마로코스'처럼 정치권력의 폭력에 적대성을 갖되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그러나 총 대신 펜과 마이크를 든 정치비판의 주체, 달리 쓰자면 '말하는' 마로코스의 귀환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아직 요원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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