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에 대한 밀레니얼의 애증 ‘05학번 이즈 히어’ [K콘텐츠의 순간들]
완공되지 않은 신도시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건설이 한창인 신도시의 공포스러운 평온함을 좋아한다. 건물은 높고 도로는 넓은데 사람도 차도 없고, 모든 시설이 새것인데 주인이 없다. 외로움과 불안을 그곳보다 안전하게 관광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입주가 예정된 사람들은 그 텅 빈 공간을 기대감으로 채우며 디데이를 기다리겠지만, 이런 곳에 살아본 적도 없고 살 거란 기대마저 희박한 나는 신도시의 그런 허무하고 황폐한 풍경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J: 너 이런 얘기 부동산 카페 아무 게시판에다 올려봐.
나: 왜? 세태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감수성이니?
K: 아니? 욕 잔뜩 먹고 바로 영구추방 되지. 소명 기회도 안 줄 듯.
친구 J와 K를 오랜만에 만났다. 식사를 마치고 J가 ‘골 때리는’ 유튜브가 있다며 ‘피식대학’의 ‘05학번 이즈 히어’를 추천했다. 그룹 내에서 프로불편러 타이틀을 감수하고 있는 나는 역정을 내며 J를 말렸다. “한국 코미디언들이 특정 집단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코미디? 그런데 그 괴롭힘의 대상이 내 또래인 05학번? 거기다 ‘아재’에 대한 연민 가득한 이 제목들! 보나 마나 불쾌할 게 뻔하다. 한국 남자 코미디언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또! 또 속냐!” 이제 이런 상황이 익숙한 J는 내 말을 모두 무시하고 ‘05학번 이즈 히어’의 11시간 분량 몰아보기 영상을 강제로 재생했다. 장장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작품에 몰입했다. 시계를 보며 자정이 된 걸 확인한 K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코미디가 아니다. 하나의 ‘세계’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앉은 자리에서 내리 여섯 시간 동안 남은 영상을 시청했다. 나는 ‘피식대학’이 만든 신도시 세계관에 완전히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05학번 이즈 히어’는 ‘피식대학’의 히트작 ‘05학번 이즈 백’에서 파생된 시리즈로, 원작의 인물들이 그대로 출연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평행우주 이론에 근거한 작품이다. 독립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작을 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2005년에서 2023년으로 차원을 이동시키는 매개가 ‘가르텐비어’(200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프랜차이즈 맥주 전문점)의 냉각 스위치(맥주를 차갑게 만드는 장치가 테이블 좌석마다 장착되어 있다)라는 깨알 같은 설정이나, 2005년에 캠퍼스를 주름잡던 무리들이 2023년에 어떤 성인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관찰자 ‘민수’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리즈 전체를 보는 것이 좋다.
‘05학번 이즈 히어’는 MZ 세대라 불리지만 Z세대와 함께 묶이기엔 어색함이 많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현재를 다룬다. 서울 연남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배용남(이용주 분)’을 필두로 그의 가족·친구·지인들을 통해 2020년대 한국 ‘30대 중산층(혹은 중산층이라 믿고 싶은)’ 그룹의 모습과 그들이 당면한 사회상을 묘사하는데, 부제가 ‘신도시 아재들’인 만큼 작품은 신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기혼 남성 ‘배용남’과 ‘정재혁(정재형 분)’을 주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먼저 그들의 차림새에 주목한다. 이제 막 첫째 아들이 태어난 배용남은 카니발 승합차를 타고 다니며, ‘마블’ 캐릭터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경기도 아웃렛에서 산 폴로셔츠의 깃을 세워 입는다. 아이 양육을 부모님에게 맡긴 IT 기업 회사원 정재혁은 테슬라를 타고 다니며, 경량 패딩을 입고,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채, 항상 주식 앱이 떠 있는 폴더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시청자들은 그들이 걷는 모습만 봐도 ‘나 저런 사람 알아!’를 외치고, 작품은 용남과 재혁뿐 아니라 모든 인물에게 이런 상징적인 기호들을 부여하며 그로 인한 웃음을 반복적으로 유발한다.
유명인에 대한 성대모사를 초월해 특정 부류, 계층, 직업 등을 집요하게 모사하고 그렇게 창작된 캐릭터의 자아로 활동하는 이른바 ‘부캐’ 코미디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다. 그러나 코미디를 억압에 대한 저항보다, 그 억압을 가리기 위한 오락의 도구로서 이용해온 한국 사회에서 부캐 코미디는 종종 부정적인 도식화나 희화화라는 문제와 충돌한다. 차별에 대한 논의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대상과의 유사성만 추구하다 보니 인물에게 부여할 서사는 빈약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사의 방식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불특정 다수를 불쾌하게 만드는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가부장제에 갇힌 신도시 언니들
‘부캐 코미디’의 이러한 단점은 유행어 위주의 짧은 콩트가 매주 비슷하게 반복되는 공개 코미디 방송 포맷에서 특히 취약성을 드러냈다. 〈놀면 뭐하니〉 〈판 벌려〉와 같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과 ‘숏박스’ ‘빵송국’ ‘피식대학’ 같은 코미디 그룹들이 부캐 전성시대를 성공시킨 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시즌제처럼 좀 더 긴 호흡을 가져갈 수 있는 방송 포맷의 변화, 코미디언 스스로가 극의 창작부터 유통까지 책임져야 하는 플랫폼의 생태 변화를 핵심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05학번 이즈 히어’ 역시 초반에는 이른바 신도시 아재 모사에 대한 당사자 그룹의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피식대학’은 모사를 통해 촉발한 단순한 웃음에서 멈추지 않고. 시청자가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서사를 부여하는 성실한 창작자의 태도를 보인다. 기혼자인 배용남과 정재혁은 아내 눈치를 보느라 친구를 만날 때도 심부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아내의 간섭에서 해방되기 위해 주차장 차 안에서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술에 취해 ‘결혼은 지옥’이라는 말을 절규처럼 내지른다. 이런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용남과 재혁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아내에게 잡혀 살아서 친구들 간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어렵고, 생업과 재테크에만 몰두하느라 멋과 패션에 관심이 사라진’ 신도시 기혼 남성들에 대한 연민으로 희석된다. 게다가 그런 모습마저 부럽게 바라보는 고독한 ‘돌싱남’ 조정구(김해준 분)의 존재는 연민의 시선을 다시 동경으로 바꿔내고, 그 자리를 ‘짝 없이 혼자 남겨진 남성’에 대한 또 다른 연민으로 대체한다.
‘닦달하는 아내’와 ‘시달리는 남편’은 오래된 코미디 소재다. ‘쓰리랑 부부’는 철저한 가부장제 안에서 그 자체로 풍자의 기능을 수행하며 인기를 끌었고,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연애와 결혼 같은 사적 영역에서 겪는 남성의 경험을 공적 영역의 성차별과 뒤섞으며 남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신도시 기혼 부부의 일상을 다루는 ‘05학번 이즈 히어’ 역시 이 계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시리즈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캐릭터인 ‘서준맘’ 류인나(박새미 분)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중심인 서사에서 꽤 상세히 묘사된다. 그는 명품 가방을 메고, 명품 화장품을 쓰고, 남편을 졸라 외제 차를 타고 다닌다. 인나는 대체로 남편을 귀찮게 하고, 요리 솜씨가 없어 내조에 소홀하며, 지적이지 않고, 시샘이 많고, 보이는 것을 중시하고, 남을 비방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칫 집안의 권력을 모두 쥐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가 보여주는 사회적 자아는 ‘된장녀’ ‘맘충’ 같은 여성혐오적 관점 위에서 설계되어 있다. 그의 역할은 다채로우나 입체적 해석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또한 작품은 이러한 인나의 부정적 특질을 모두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내 아내’라는 가부장제의 클리셰로 봉합하며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설거지론’은 공부와 일밖에 모르고 연애 경험도 없는 순진한 남자가 연애 경험이 많은 노처녀와 결혼해 죽을 때까지 일만 하며 자신의 삶을 잃는다는 일부 2030 남성들 사이에 공유되는 개념으로 그들은 이것이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이 아닌, 한국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라 주장한다. 이 이론 안에서 여성은 ‘더러운 접시’이며, ‘호구 같은’ 남성은 그 접시를 닦는 ‘퐁퐁(주방세제)’, 기혼자들의 결혼·출산·양육이 수월하게 설계된 신도시는 ‘퐁퐁 시티’라 불린다. ‘05학번 이즈 히어’는 과거 어떤 작품들과 비교해도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엿보이는 훌륭한 코미디이지만, 여성 인물 묘사의 구조적인 한계와 극의 관점을 대변하는 화자와 여성 인물 간의 관계가 ‘신도시’라는 배경 안에서 자학적 여성혐오 담론과 만나며 괴로운 감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영어유치원 학예회’ 방송이 레전드 된 이유
밀레니얼 세대의 보고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05학번 이즈 히어’는 ‘아재론’ ‘설거지론’과 같은 젠더 담론 외에도 ‘수저론’ ‘영끌’ 등 밀레니얼 중산층이 어설프게 구축하고 있는 계급적 불안을 읽을 수 있다. 올해 초 업로드되어 수많은 찬사를 받았던 에피소드 ‘서준이 영어유치원 학예회’는 ‘05학번 이즈 히어’ 시리즈의 주역인 이용주·박새미 두 코미디언의 탁월한 재능과 ‘피식대학’이 추구하는 모사의 풍자적 기능이 만개한 에피소드다. 20분 남짓한 영상에는 경기도에 살지만 서울 한남동 영어유치원에 서준이를 입학시킨 용남과 인나 부부만 등장한다. 둘은 나란히 앉아 다른 아이의 부모가 타는 차, 그들이 사는 집, 그들이 사는 방식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그것을 질투하다가 ‘다 부질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위안 삼는다. 그러다 용남이 자신의 차보다 가격이 싼 차를 타는 부모에게 우월감을 느끼면서 영상은 끝이 난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도시 아파트에 살면서, 구도심의 부촌 택지에 입성하고 싶어 하는 용남과 인나의 속물근성은 왠지 물질보다 역사에 대한 갈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피식대학’은 ‘일산 토박이’ ‘분당 토박이’라는 말이 가능한 밀레니얼 세대가 정신적 고향인 신도시에 가지는 애정과 증오를 얘기하고, 그들이 또 다른 신도시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훼손되는 자존감을 포착한다. ‘피식대학’이 원래 생각했던 이 시리즈 제목은 ‘신도시의 슬픔’이다. 태어나 한 번도 신도시에 살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이들이 말하고 싶은 신도시에 대한 밀레니얼의 양가적 감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것은 ‘새것이 가장 좋다’는 저주 같은 세뇌가 우리에게 심은 근본에 대한 콤플렉스이며, 한정된 기회를 놓고 끝없이 경쟁하다 결국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허기에 가깝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개인의 몫이겠지만, 그전에 나는 우리 세대가 가진 공허함을 인정하고 쓰다듬는 것이 먼저란 생각이 든다. 일산 토박이인 BTS RM의 랩은 정말 좋은 BGM이 되어준다.
일산, 내가 죽어도 묻히고픈 곳
It's the city of the flower, city of 몬
집 같던 라페스타 또 웨스턴돔
어린 시절 날 키워낸 후곡 학원촌 uh
세상에서 가장 조화로운 곳 uh
자연과 도시, 빌딩과 꽃 uh
한강보다 호수공원이 더 좋아 난.
복길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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