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보다 작창, 소리꾼 이자람의 노래
이자람은 유명한 사람이다. 다섯 살에 노래 ‘내 이름(예솔아!)’을 불러 국민 꼬마 가수 ‘예솔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스무 살 때는 최연소로 동초제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춘향가’와 ‘적벽가’를 이수한 국내의 대표적 판소리 작창가이자 록밴드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유명세와는 거리를 둔 사람이기도 하다. 국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온갖 편견과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거, 사람들에게 환대받지 않는 거를 나는 왜 할까? 이 질문을 어릴 때부터 끝없이 했다. 만약 내가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이런 질문을 더 늦게 하지 않았을까. 피아노 신동은 모두가 사랑하니까.”
이자람은 간극과 낙차 안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길을 가면 TV에서 봤다며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학교에 가면 건방지다며 친구들이 괴롭혔다.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하면 좋아하다가 국악인이라고 하면 무관심해졌다.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했을 것 같다고 묻자 그는 ‘균형’ 대신 ‘계속 내 주제를 알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을 골랐다. 이제는 “왔다 갔다 하는 게 재미있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불안이 자신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열 살 때 판소리를 시작해 30년 넘게 무대를 벗 삼아온 그는 이제는 ‘판소리를 왜 하느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너무 잘하니까 한다.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건 없다. 심지어 좋아한다. 할 때마다 재미있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최고가 되겠다는 예인의 욕망과 다투지 않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서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소리를 만들고 있는 이자람을 4월4일 만났다. 그는 지난달 개막한 창극 〈정년이〉에서 극에 들어가는 모든 노래를 만드는 ‘작창(作唱)’과 음악감독을 맡았고, 이달 말 열릴 판소리 공연 〈노인과 바다〉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는 5월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연극 〈오셀로〉에 배우로 참여한다.
이자람은 판소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선도적인 작창가다. 작창가는 쉽게 말해서 ‘판소리 작곡가’다. 작창가는 귀하다. 판소리의 음악적 요소를 숙련되게 다룰 줄 아는 소리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작 판소리는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판소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분류된다. 이전까지 동시대 사람들의 해학과 재담을 담아내던 판소리는 어느새 시대와 단절된 전통음악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된 이야기와 새롭게 창조된 소리를 담은 창작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판소리 공연장을 찾았다. 여기에 작창가 이자람의 소리가 큰 몫을 했다. 현재는 국립창극단에서 ‘작창가 프로젝트’를 따로 꾸리며 작창가 육성에 나서고 있다. 이자람 역시 이곳에서 멘토로 참여해 학생들을 만난다.
동시대 감수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그는 왜 새로운 이야기와 소리를 만들었을까? 이자람은 그 시작에 분노가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생 때 ‘언니네(여성주의 포털사이트)’를 들락거렸다. 그런데 누가 익명 게시판에 자신이 당한 성폭행 이야기를 써놨다. 그걸 읽는데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분노를 어떻게 할 줄 모르겠더라.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판소리 창본을 쓰고 노래를 만든 첫 작품이 ‘구지가’다.” ‘구지’는 ‘지구’를 뒤집은 행성의 이름이다. 지구와 반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흔히 겪는 구조적 부조리함을 담았다. 심각하고 비장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판소리는 재미있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썼다. 재미있고, 화가 잔뜩 담긴 작품이 내 첫 작품이었다.”
2001년 국악뮤지컬집단 ‘타루’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한 이후 이자람은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들을 판소리극 〈사천가〉 〈억척가〉로 만들며 전 세계 관객들을 만났다. ‘이자람’ 이름으로 국내외 공연장을 만석으로 채웠다. 이후 주요섭,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각각 판소리극 〈추물/살인〉 〈이방인의 노래〉 〈노인과 바다〉로 다시 쓰고, 선율을 입혀 무대에 올렸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은 전통 판소리의 서사가 시대적 감수성과 맞지 않은 탓도 있었다. 어릴 때는 판소리 사설을 “어린 새가 모이 받아먹듯 가르치는 대로 따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선시대에 쓰인 판소리 사설들과 종종 멱살 잡고” 싸우게 됐다. 동갑인데도 춘향은 존댓말을, 몽룡은 반말을 했다. ‘여보 마누라’ ‘세상 병신 많다 해도 아버지를 당할쏜가’ ‘계집은 또 구하면 되지마는’ 같은 말들이 불편했다. 창을 하는 자신부터 재미가 없는데 듣는 사람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대면하는 숙제들을 새로운 이야기로 썼다.
사람들은 그 행보를 두고 ‘이자람이 판소리 대중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판소리 대중화에 앞장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냥 판소리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운 좋게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서, 그 할 줄 아는 모든 것을 판소리에 쏟아부은 사람이다. 그런 작품들이 사랑받으면서 판소리를 잘 모르던 관객들이 이자람 공연을 보러 왔다가 다른 창극 공연도 보러 가게 되고 대중화라는 현상을 이끌어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내 길을 갔을 뿐이지 ‘판소리 대중화를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도 사명감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한때는 혁명을 일으키는 예술을 좋아했다. 예술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과거에는 그럴 수 있는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악(惡)이 훨씬 똑똑해졌기 때문에 예술을 도구 삼아 사람을 움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예술은 사람들이 악해지는 걸 조금이라도 무뎌지게 할 수 있는 정도?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내가 하는 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기부하는 일이다.”
작고 사소한 장면의 힘
2011년 처음 무대에 올렸던 〈억척가〉로 전 세계 관객들을 만나오던 이자람은 돌연 3년간 ‘작품도, 소리도 멈추는 시간’을 갖는다. 〈억척가〉는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이자람이 다시 쓰고 소리를 입힌 작품이다. 원작의 주인공인 안나 피어링은 김순종에서 김안나로, 김억척으로 이름을 바꾸며 전쟁터 시체더미 속에서 물건들을 주워 팔아 세 아이를 먹여 살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타인의 죽음에 빌붙어 억척같이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결국 자식들을 모두 잃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겪는다. 이자람은 2시간40분 동안 이어지는 공연에서 1인 15역을 하며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발성과 소리로 이 이야기를 표현했다. 작품은 찬사를 받으며 브라질, 프랑스, 루마니아 등 투어 공연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공황장애와 이명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극장에 오른 어느 날은 몸에 열이 오르고 숨이 막혀 ‘이대로 무대 위에서 죽으려나’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 구급차를 미리 불러달라고 스태프에게 부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억척가〉를 이자람은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무대 위에 계속 오르려면, 멈춰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무대를 앞두고 어리석어지고, 조급해지고, 자학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목표를 두고 모든 걸 감내하는 그런 게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척가〉 이후부터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예민한 나를 계속 떼어내고 작품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데 힘을 쓰는 일이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 일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늘 생각한다.”
침묵의 시간을 보낸 후 그가 다시 들고 온 작품은 〈이방인의 노래〉였다.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이 원작이다. 쿠데타로 쫓겨난 대통령이 스위스 제네바에 요양차 왔다가 병원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는 이주노동자 오메로와 그의 부인 라사라를 만나는 이야기다. 이자람은 〈이방인의 노래〉가 〈억척가〉에 반하는 작고 소소한 이야기지만 마음속에 폭발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방인의 노래〉에서 이자람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대통령을 꼴 보기 싫어했던 라사라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이해하는 순간을 맞는 장면이다. 납작하게 글자로 쓰면 너무나 쉬운 ‘용서’나 ‘이해’이지만, 한 사람 마음 안에서는 천지개벽할 만큼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에서는 홀로 드넓은 바다 배 위에서, 청새치를 잡은 밧줄을 놓지 않은 노인이 저 멀리 날고 있는 휘파람새를 보며 이름이 뭐냐고 묻는 장면을 사랑한다. 그는 이런 장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런 눈을 갖게 돼서 운이 좋다고도 했다.
이자람은 매일 판소리를 연습한다. 흥부가·수궁가·춘향가·적벽가·심청가까지 전통 판소리 다섯 마당의 레퍼런스를 30여 년간 매일 반복하는 마음은 어떨까. “지난 3년 정도는 수궁가를 매일 연습했다. 다섯 마당을 하나씩 돌려가면서 연습을 하는 게 아니고 하나가 잡히면 그걸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연습한다. 그때마다 끊임없이 발견되는 게 있다.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천천히 느껴야 한다.” 요즘은 적벽가를 새로 시작할지 수궁가를 계속할지 고민하고 있다. 소리를 바꾸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테이블 끝을 손끝으로 감싸면서) 마무리를 하면서 소리를 놓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가 적벽가를 적벽가답지 않게 한다. 누가 들으면 잘 모를 순 있지만 내 귀에는 들린다. 이걸 뜯어고치려면 정말 어렵고 힘들다. 근데 그게 연습이다. 뜯어고치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습득하고, 자다가 벌떡 깼을 때도 내 목이 새로 연습한 그 방식으로 소리 나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는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우아하게 소리를 연마했는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기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귀가 밝은 ‘귀명창’이 많은 공연을 하고 싶다.” 이자람의 소망은 당연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공연장을 찾아오는 관객들과 세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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