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포도는 자란다’... 전쟁·쓰나미·지진마저 이겨낸 승리의 와인

유진우 기자 2023. 4. 2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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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삶의 동력을 얻는다. 와인 역시 역경을 거칠수록 무르익는다.

1945년,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점. 프랑스 보르도 와인 명가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포도를 모아 그해 와인을 빚었다.

이 와인은 70여년이 흐른 지금도 현대 와인 역사에서 단 1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전설’로 통한다. 1939년부터 6년 동안 전쟁이 이어진 밭에는 이전보다 풍부한 양분이 쌓였다.

매년 반복해서 포도나무를 키웠던 토양은 6년 동안 머금은 지력(地力)을 한 번에 뿜어냈다.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프랑스 양조자들도 이전보다 의욕적으로 소매를 걷어 붙였다.

1945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에는 종전을 기념한 승리의 알파벳 ‘브이(V)자’가 그려져 있는데, 이 자리는 이후 피카소와 샤갈, 달리, 이우환 등 세계적인 화가로 이어지는 아트레이블의 기원이 됐다. 영국 유명 와인 전문 매체 ‘디캔터’는 이런 역사성을 들어 이 와인을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와인’ 1위로 선정했다.

지난해부터 내내 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제 2의 1945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가 싹을 틔우고 있다. 이달 우크라이나 와인협회(wines of Ukraine)에 따르면 올해 우크라이나 와인 양조용 포도는 예년에 비해 작황과 품질 면에서 월등히 좋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와인대사로 활동하는 소믈리에 예브게니아 니콜라이추크는 본인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여느 해보다 건조했던 덕분에 고질적인 포도나무 전염병이 돌지 않아 수확량이 늘었다”며 “이전에 인근 국가 와인을 마시던 소비자들도 애국심 고취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산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소비량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적었다.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졌지만, 우크라이나는 동유럽권에서 몰도바, 루마니아, 그루지아(조지아)와 함께 와인 생산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북위 46도에 자리잡고 있어 프랑스 유명 와인 산지인 보르도와 위도가 비슷하다.

이 지역에서 양조용 포도를 처음 재배한 것은 기원전 8세기, 와인을 담았던 항아리(암포라)가 발견된 때는 기원전 4세기 경 무렵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와인 산업 역시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1990년대 이후 기지개를 펴기 시작해 2010년대에는 완연히 무르익었다.

그래픽=손민균

그러나 우크라이나 내 주요 생산지였던 크림반도가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우크라이나 와인 산업은 급격히 쪼그라 들었다.

이 무렵부터 크림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내수용으로 소진하던 와인을 수익 확보 차원에서 뒤늦게 다른 국가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여러 우크라이나 와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옆 몰도바나 그루지아 와인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와인은 바스타르도, 오데사 블랙 같은 개성 있는 포도 품종을 가지고도 소믈리에 사이에서조차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최근 들어 물류와 생산량 문제로 이전만큼 넉넉하게 우크라이나 와인을 구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호기심을 가지는 소비자와 전문가들은 점차 늘어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와인업계에서 우크라이나 사례처럼 전쟁 같은 인재(人災)나 쓰나미, 지진 같은 위기를 기적처럼 기회로 반전시키는 일은 종종 벌어진다.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 주류 시상식 IWSC(International Wine & Spirit Competition)에서는 일본 후쿠시마(福島) 오우세 와이너리가 만든 사과 와인이 은상을 받았다.

당시 미디어들은 ‘포도를 제외한 다른 과실로 만든 와인에 보수적인 심사위원들마저 설득시킨 맛’이라며 이 와인을 추켜 세웠다.

오우세 와이너리는 이후에도 국내외 주류 시상식에서 매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올해는 세계적인 포도품종 샤르도네로 만든 와인이 일본 스가노 토요·사쿠라 어워드에서 은상을 받았다.

오우세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오카와라 히사노는 2015년 후쿠시마 재건을 지원하는 미쓰비시상사와 제휴해 이 와이너리를 세웠다.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은 엄격한 방사능 통과한 과실로 만든다.

와이너리 측은 “유럽연합(EU)과 미국은 일반 식품을 기준으로 방사성 세슘 상한선이 1킬로그램 당 1200베크렐이지만, 우리는 이보다 10배 이상 엄격한 킬로그램 당 100베크렐을 기준치로 두고 있다”며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인근 농가를 살리기 위해 시작한 와이너리인만큼, 소비자를 설득하려면 생계를 걸고 우수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쓰촨성(四川省) 대지진으로 고초를 겪은 중국 쓰촨 지방 중심도 청두(成都)는 지진 이후 중국 본토에서 가장 큰 와인 박람회를 치르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이 지역 일대는 예로부터 물이 좋아 중국에서도 명주(名酒)가 나오는 곳으로 손꼽혔다. 전 세계에 이름난 마오타이(茅台酒)가 쓰촨성에 인접한 구이저우성에서 나오고, 쓰촨성 역시 하늘에서 내려 준 신선의 물로 빚었다는 노주노교(泸州老窖)의 고향이다.

그러나 대지진 이후 청두 경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중국 정부까지 나서 이전에 중국 내에서만 소규모로 치르던 바이주(白酒) 중심 박람회를 와인까지 포함한 세계적인 주류 박람회로 확대했다. 이 박람회는 예상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둬 올해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큰 주류 관련 박람회로 자리를 잡았다.

브랜드 포지셔닝 전문가인 김소형 데이비스앤컴퍼니 컨설턴트는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겪으면 산업적인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당장 눈에 띄는 실적을 거두긴 어렵다”며 “반면 이전까지 브랜드를 모르던 소비자들은 이 기간에 인지도가 높아지는 점을 감안해 미래를 겨냥한 다양한 캠페인을 펼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1910년대 일제 시대 광산으로 쓰던 광명시 광명동굴을 2011년 와인을 보관하고 관련 문화를 알리는 관광지로 다시 꾸며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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