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는 직원들도 내려와라” 지자체 요구에 난감한 포스코
지자체들 ‘과도한 구애’ 배경엔 지방 소멸 위기
[비즈니스 포커스]
포스코 지주회사 포스코홀딩스의 정기 주주 총회에서 본사 소재지를 서울에서 경북 포항으로 이전하고 미래기술연구원 본원을 포항에 설치하는 내용의 안건이 최종 통과되면서 1년 이상 끌어 왔던 포스코와 포항시 간 갈등이 일단락됐다.
포스코는 2022년 3월 투자형 지주회사(포스코홀딩스) 아래 철강 등 사업 자회사를 두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당초 포스코홀딩스의 본사 소재지를 서울에 두기로 했지만 포항 시민 1000여 명이 최정우 회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상경 집회까지 벌이면서 결국 지주회사·미래기술연구원 소재지의 포항 이전에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포항 지역 사회가 포스코홀딩스 본사 소재지 이전에 이어 지방 소멸 위기를 내세워 인력의 이전까지 요구하고 있어서다.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포항 남구·울릉)은 “본사 이전이 단순한 주소 이전에 그쳐서는 안 되고 포항에 새로운 포스코 타운을 조성하고 인적 자원이 이동하는 실질적인 본사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포스코 측은 포스코홀딩스 본사 이전을 약속대로 이행했고 소속 직원 200여 명은 법무·재무·대관·홍보 등 업무 특성상 서울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포항 배치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업계에선 포스코그룹이 2차전지 소재를 미래 먹거리로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우수한 정보통신기술(ICT) 연구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포항보다 수도권 소재가 유리하다고 본다. 포스코는 미래기술연구원 본원은 포항에 설치하고 수도권에 분원을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포항 지역 사회가 반대하고 있어 험로가 예상된다.
“포스코 핵심, 포항에만 3곳” 뿔난 광양시
포스코홀딩스의 포항 이전이 확정되면서 광양시도 지역 역차별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양제철소가 있는 전남 광양시는 지역 균형 발전 차원에서 경북 포항에 있는 포스코그룹의 2차전지 소재 계열사인 포스코퓨처엠(구 포스코케미칼) 본사의 광양 이전을 촉구하고 있다.
광양시는 최근 성명문을 내고 “포스코 지주회사인 포스코홀딩스가 포항으로 이전하면 포스코 본사와 포스코퓨처엠 등 포스코 3개 핵심 기관이 포항에 자리 잡게 된다”며 “세계 최대 (포스코 광양) 제철소로 성장하는 과정에 적극 협조하고 불편을 감내해 온 광양 시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소외감과 박탈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포스코는 앞다퉈 2차전지 분야 투자를 유치하려는 경북도와 전남도의 샅바 싸움에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전남도는 광양만권을 2차전지 산업의 메카로 조성 중이다.
광양에는 연 9만 톤 규모로 준공할 양극재 공장, 리튬 원료를 생산하는 포스코필바라리튬솔루션, 폐배터리 리사이클링으로 원료를 공급하는 포스코HY클린메탈 등 포스코그룹의 2차전지 소재 사업 인프라가 집적돼 있다.
포스코의 2차전지 소재 계열사가 광양만권에 잇달아 입주하면서 연계 기업들의 투자도 활발해진 만큼 전남도는 포스코 계열사 유치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포스코그룹은 4월 19일 전남 광양 동호안 부지에 4조4000억원을 투입해 2차전지 소재를 비롯한 신성장 사업 추진에 나선다는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북도도 2차전지 분야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지난 2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는 ‘국가 첨단 전략 산업 특화 단지’ 지정 2차전지 분야에 공모를 신청하는 등 배터리 선도 도시로 도약을 꾀하며 관련 기업 유치에 집중하고 있다.
포항에는 포스코퓨처엠을 비롯해 에코프로비엠·에코프로 등 2차전지 소재 기업들의 투자가 몰리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2022년 4월 포항영일만산업단지에 연산 3만 톤 규모의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 양극재 공장을 착공했는데 같은 부지에 3920억원을 투자해 연산 3만 톤 규모의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양극재 전용 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했다.
2025년에는 포항에서만 6만 톤 규모의 양극재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포스코홀딩스의 자회사인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2025년까지 영일만산업단지 내 3000억원을 투자해 연산 5000톤 규모 실리콘 음극재 생산 공장을 건립할 예정으로 관련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된다.
사기업인데 외풍 과도…시각도
일각에선 지자체와 정치권이 사기업인 포스코를 두고 과도한 경영 개입을 하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포스코는 KT·KT&G와 함께 지배 주주가 없는 대표적인 소유 분산 기업이다.
포스코는 2000년 민영화된 이후 정권 교체 시기에 맞물려 최고경영자(CEO)도 교체되는 정치 외풍에 시달려 왔다. 최정우 회장 이전 포스코 수장 8명 가운데 정권 교체 후 임기를 채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지자체와 정치권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로 기업 경쟁력이 저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물론 모든 기업이 지방 이전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일부 기업은 경영 효율화 차원에서 비수도권(지방) 이전을 선택하고 있다.
티웨이항공은 본사 소재지를 서울에서 대구로 이전하기로 했는데 2030년 대구경북신공항 개항 일정에 맞춰 본사 기능을 단계적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다. 티웨이항공은 코로나19 확산 이전까지만 해도 대구공항 국제선 여객 수송의 절반 이상을 소화하는 거점 항공사 역할을 맡아 왔다.
현대엘리베이터는 2022년 경기도 이천에서 충북 충주로 공장과 본사를 이전했다. 기존 본사와 공장 부지가 협소해 증설이 어려워지자 물류비 절감과 연계성 강화 등을 위해 본사와 공장을 함께 이전한 것이다.
포스코를 둘러싼 포항·광양 두 지자체의 ‘과도한 구애’의 배경에는 지방 소멸 위기 심화가 있다. 한때 53만 명에 달했던 포항시 인구는 2022년 50만 명 선이 붕괴됐다. 2023년 3월 기준 포항시 주민 등록 인구는 49만여 명이다.
양질의 일자리, 인프라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지역 간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국토의 12%를 차지하는 수도권에 총인구의 50.3%, 청년 인구의 55.0%, 일자리의 50.5%,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의 86.9%가 집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지방 이전을 꺼리는 데는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어려워서다. 석·박사급 인재가 선호하는 용인·기흥 라인, 판교 라인까지를 ‘남방한계선’이라고 부를 정도다.
사무직과 연구·개발직은 판교, 기술직은 기흥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평택, SK하이닉스는 용인에 신규 생산 공장을 짓고 있어 대기업들은 “이 지역을 벗어나면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어렵다”고 본다.
수도권에 인재 몰리는 ‘남방한계선’ 현실
정부가 민간 투자로 2042년까지 총 300조원을 들여 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한다고 발표하면서 수도권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다른 지역이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판교·광교테크노밸리와 안산사이언스밸리 등 첨단 기술 산업 연구·개발(R&D) 클러스터가 있는 경기도는 정보기술(IT)·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전화 등 첨단 산업 투자가 몰리고 있다. 인천·김포국제공항과 19개 고속도로, 8개 철도로 수도권을 한 시간에 연결하는 편리한 교통 인프라가 장점으로 꼽힌다.
HD현대그룹은 성남시에 글로벌R&D센터(GRC)를 구축했고 SK그룹은 부천대장신도시에 친환경 에너지 R&D 연구 시설인 SK그린테크노캠퍼스(가칭)를 건립할 예정이다. SK그린테크노캠퍼스에는 SK이노베이션·SK에너지·SK지오센트릭 등 SK그룹 계열사 약 7개사가 입주하고 연구 인력 등 3000여 명이 근무하게 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매출 기준 1000대 기업 중 152곳을 대상으로 ‘기업의 지방 이전과 지방 이전 사업장 신증설에 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기업이 지방 이전을 꺼리는 요인으로 ‘시간·비용 증가 등 교통·물류 인프라 부족(23.7%)’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업계 관계자는 “광역급행철도(GTX)까지 개통되면 서울 지역과 경기 주요 도시를 30분 안에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서울에 본사와 계열사를 둔 대기업들의 수도권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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