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단단히 뿌리내려 간 모자의 초상 '라이스보이 슬립스'
※ 스포일러 주의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이민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성을 걷어낸 곳에 존재하는 건 보편적인 시대와 존재의 초상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일깨우고 삶에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 또한 정체성이라는 벽과 자신의 뿌리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그게 바로 '라이스보이 슬립스'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한 이야기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감독 앤소니 심)는 1990년 모든 게 낯선 캐나다에서 서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 소영(최승윤)과 아들 동현(어린 동현 역 황도현/큰 동현 역 이든 황)의 잊지 못할 시간을 담은, 문득 집이 그리워질 따스한 이야기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4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해 자라난 한국계 캐나다인 앤소니 심 감독의 반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영화다.
감독은 "이민자로 살아가며 한국적인 것을 숨기려고 했지만 한국을 향한 애정, 호기심, 이해도 함께 자라났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나의 뿌리에 대해 알고 싶었고, 영화를 통해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다"며 "내가 겪은 이야기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이민자들의 경험, 생각, 감정 모든 것을 쏟아내서 작업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이민자를 비롯한 유년 시절을 지나온 모두를 아우른다. 1990년 낯선 캐나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했던 엄마 소영과 아들 동현이 함께 행복하고 따로 또 같이 상처받으며 긴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
영화는 이민자의 이야기이자 한국이라는 자신의 뿌리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이자, 모자의 이야기다. 이민자는 이방인이자 경계인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경계인으로서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인종의 벽을 떠나서 말이다.
자신의 뿌리인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역시 누구나 갖고 있다. 모자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엄마와 아들 간 이야기이자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듯한 존재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특수성'을 떼놓고 본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경계에 놓여 정체성을 고민하는, 관계로 인해 행복하고 어렵기도 한 이들의 초상(肖像)이다. 또한 강인했던 우리들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마치 앨범 속 사진을 하나씩 꺼내보며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분위기를 전달한다. 실제로 감독은 16㎜ 필름 촬영을 통해 그립고 따뜻했던 그때의 기억을 들춰보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초반 소영과 동현의 이야기임을 알리는 내레이션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소영과 동현의 여정을 보면 현대사, 이민자의 역사도 엿볼 수 있다. 과거 미혼모는 아이를 호적에 올릴 수 없어서 아이는 서류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에 소영은 어린 동현을 데리고 낯선 땅 캐나다로 떠난다. 그곳에서 소영은 공장에 취직하고,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인종차별의 대상이 된다. 아들 동현 역시 백인들의 사회에서 쉽사리 그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아이들은 점심으로 밥을 먹는 동현을 '라이스보이'라 놀린다.
영화는 '9년 후'라고 자막을 띄워 그사이 공백을 건너뛰지만, 동일한 장소에 놓여 있는 이들이 어떻게 9년 전과 달라졌는지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변화를 드러낸다. 소영은 흰머리가 늘었지만, 여전히 강인하고 씩씩하다. 9년이란 시간이 그를 조금 더 힘겹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그는 여전히 '소영'이다.
아들 동현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안경을 벗어던진 채 컬러 렌즈를 낀다. 자신 안에 담겨 있던 '한국' '동양인'의 흔적을 지우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생물학적인 한국인 내지 동양인과 문화적인 캐나다인 경계에 선 동현은 속해 있되 속해 있지 못한다.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흔적들을 지우려 했지만, 자신의 뿌리가 궁금하다. 그런 동현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선택과 흔들림 속에 살아온 소영과 동현이 찾은 길은 자신의 과거,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 땅을 밟는 거였다. 소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용기 있게 과거 상처받고 외면한 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그리고 동현의 조부모를 만난다. 특히 강인함으로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왔던 소영은 죽은 남편의 묘를 찾아가 그간의 세월을 토해내듯 마음껏 토해낸다. 그 순간의 소영은 진정 강인하고 아름답다.
동현은 한국에서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정체성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 노랗게 물들였던 머리를 잘라내고, 검은 머리의 자신을 보며 어색하지만 미소 짓는다. 놀림 받는 게 싫어서 벗어뒀던 안경도 다시 쓴다. 단순한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이 '동현'이라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동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마치 소영과 동현이 있어야 할 곳으로 왔다는 듯 1.33:1의 화면비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한국으로 넘어오며 1.78:1로 넓어지는 순간, 화면비의 확장이 주는 감동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그리움에서 현실로 발 디딘 모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듯 다정하게 마음으로 다가온다.
이번 영화를 통해 장편 데뷔한 안무가 출신 배우 최승윤은 안정적이고 섬세하게 현실에 존재하는 소영을 스크린에 옮겨온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 새로운 얼굴의 재발견이다. 어린 동현 역 황동현과 큰 동현 역 황이든 역시 뛰어난 연기로 자연스럽게 눈과 마음을 향하게 한다.
117분 상영, 4월 19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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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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