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그려 의뢰인에 주지 않은 이유(일타강사)[어제TV]

서유나 2023. 4. 20.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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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서유나 기자]

모나리자 등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공개됐다.

4월 19일 방송된 MBC 예능 '일타강사' 23회에서는 서양 미술사 전문가 도슨트 이창용이 일타강사로 출연해 가르침을 선사했다.

이날 강사로 출격한 이창용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시작해 세계적인 박물관인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등에서도 10년 정도 도슨트로 활약한 인물.

이창용은 낯선 '도슨트'라는 직업에 대해 "큐레이터랑 많이들 혼동하시더라"며 "큐레이터 같은 경우 전시가 시작되기 전 '이번 전시는 어떤 주제로 할 것인가' 틀을 짜는 사람, 기획 단계에서 일하는 사람. 도슨트는 전시장이 꾸며진 이후 사람들에게 전시 테마, 주제, 작품 관련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이창용은 루브르의 그랑 갤러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때문이라며 "다 빈치가 굉장히 특이한 화가. 67살까지 살았는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건 14살 때부터였다. 대략 화가로 산 시간이 53년. 500년 전 사람치고는 활동을 오래했다. (그런데) 다 빈치가 그린 것으로 확실한 작품은 최소치로 잡았을 때 딱 13점밖에 없다"고 해 흥미를 유발했다.

그는 그 이유가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완벽주의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생각을 밝혔다. 그러곤 다 빈치가 "작품 하나를 두고 30년간 그리기도 했다. 그리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그림 그리는 걸 중단하고 연구를 했다"고 이유를 전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런 다 빈치 작품 중 무려 5점을 소장 중이었다.

이창용이 생각하는 다 빈치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은 말년에 그린 '성 안나와 성 모자'로 예수의 외할머니와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를 그린 작품이었다. 해당 작품은 "다 빈치가 이 작품을 가장 아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다 빈치가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작품"이었다.

이창용은 작품에 숨겨진 사연을 전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서자 출신이다. 어머니는 고아 출신에 가난했다. (다 빈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헤어지고 단 한 번도 어머니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 그런 그가 40대쯤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쌓았을 때 어머니가 이후 만난 가족들과 다 헤어지고 홀로 남겨졌다는 애기를 듣는다. 다 빈치는 평생 굶주린 어머니의 사랑을 그때라도 느끼고 싶었는지 집에 모시고 와 함께 살기 시작하는데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불과 1년 만에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아마 '내 어머니도 저 그림 속 성모 마리아처럼 날 아끼시고 사랑하지 않으셨을까'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평생 소유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모나리자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는 "작품 속 등장하는 여인은 피렌체에서 활동한 비단 상인의 부인이었다.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가격이 집 한 채와 맞먹었으니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돈 많은 상인이 시집살이를 하다가 독립을 하게 됐다. 새로 집 사서 이사가는데 기념해 다 빈치에게 의뢰를 했다. 중요한 건 다 빈치가 그려놓고 안 준다. 자기가 가져버린다. 그려놓고 보니 작품이 너무 대단한 거다. 본인 스스로 생각했을 때도 작품의 완성도가 뛰어나고, 내 평생 쌓아올린 기술을 다 집어넣은 작품이라는 생각에 작품 완성된 이후에도 개인이 소장해 버린다"고 말했다.

이창용은 모나지라가 최고의 예술품인 이유에 대해 "(모나리자는) 초상화의 기틀을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다. 예전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정면샷을 잘 안 그리고 측면을 많이 그렸다. (측면이) 훨씬 쉽기 때문. 다 빈치는 초상화를 그릴 때 항상 정면을 그렸다"면서 이는 인물의 감정을 전할 수있는 '눈'을 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또 "이 그림엔 다 빈치가 그림을 그리며 쌓아올린 기술력이 다 들어있다. 심지어 다 빈치가 이 그림을 그리며 재미난 요소도 집어넣었다. 바로 모자리자의 미소다. 한 번쯤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시지 않냐. 심지어 '눈이 따라온다'는 얘기도 하시는데 실제 눈이 따라오진 않는다. 이게 약간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다 빈치가 초상화를 그릴 때 웃긴 일화가 있었다. 여성이 광대, 악사를 데려와도 웃지를 않았다더라. 그러다 웃는 순간이 남편이 작업실에 찾아왔을 때 살짝 웃었다더라. 이 여자의 감춰진 비밀스러운 미소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감춰진 미소를 표현하기 위해 입술 부분 그리길 중단한 다 빈치는 피렌체 한 병원에서 안면 해부학과 안구 해부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람이 미소를 지을 때 사용하는 모든 근육과 흘겨보는 시신경 구조를 확인했다. 평생동안 13점밖에 그리지 못한 이유가 확인되는 일화. 모나리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가 60여 년 평생 쌓아온 모든 지식의 집결체라는 설명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창용은 오르세 미술관의 본인이 생각하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10점 중 하나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꼽았다. 그는 '이 작품이 그려진 게 1863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림을 이렇게 그려야 한다가 정해져 있었다. 주제는 역사 종교 초상 풍경. 그때 에두아르 마네가 문득 왜 저런식으로만 그림을 그릴까 생각을 했던 것 같다"며 마네가 무려 성매매나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곳인 실제 파리 서쪽에 있는 '불로뉴 숲'을 배경 삼아 옷을 벗고 있는 여성들의 그림을 그린 사실을 전했다. 심지어 전라의 여성은 당시 실제 활동하던 모델 겸 매춘부였다.

그림에 여신이 아니면 살아있는 여성은 옷을 벗고 등장하면 안 되는 법칙이 있던 당시, 해당 그림은 부르주아의 일상을 파격적으로 그리며 도덕적인 척하는 부르주아의 가식을 비난하고 일침하는 의도로 그려졌다. 이창용은 이에 분노한 부르주아들이 그림을 온갖 트집을 잡아 비난하는 바람에 "1863년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현재는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여겨진다고 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MBC '일타강사' 캡처)

뉴스엔 서유나 stranger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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