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중단' 강제권 없는 당국…"금융사 자율 유예 추진"
'선순위 채권자' 금융사에 사실상 협조 요청
유예 강제할 수 없어 금융사 자율 결정에 맡겨
일단 시간벌기…피해자 보호책 논의 뒤늦게 '속도'
인천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진 끝에 정부가 뒤늦게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선 가운데 금융당국은 피해자가 거주 중인 문제의 주택에 대한 경매‧매각 처분을 유예하는 방안을 20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일단 급한 대로 선순위 채권자인 금융사들의 해당 주택 경매‧매각 처분을 미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강제하는 건 아니어서 자율적으로 유예 여부를 결정하게 될 금융사들의 판단이 대책 성패를 좌우할 전망이다.
금융감독원은 전날 '전세 사기 피해 관련 금융권 자율적 경매‧매각 유예 추진' 방안을 내놨다. 윤석열 대통령이 관련 지시를 내린 지 하루 만에 나온 긴급 처방이다. 전세 사기 주택 선순위 채권자인 금융사들의 주택 경매‧매각 처분을 6개월 이상 뒤로 미뤄보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당장 처분이 이뤄지면 후순위 피해 세입자들은 전세 보증금을 아예 돌려받지 못하거나 소액만 회수한 채 거리로 내몰리는 만큼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취지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른 점을 고려해 피해자가 원하는 경우에 한해 경매 개시가 유예될 수 있으며, 경매가 이미 진행된 경우엔 매각 연기가 추진된다.
다만 금감원은 경매‧매각 처분을 미룰지 여부는 금융사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금융사들의 재산권 행사를 당국이 강제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금융사들의 협조를 구하는 내용이지만, '전세 사기 문제의 심각성'을 명분 삼아 이를 발표함으로써 강제 효과를 노린 것으로도 풀이된다.
금감원은 이번 유예 조치 시행을 위해 국토교통부로부터 전세 사기 피해 주택의 주소를 입수해 은행‧비은행권 금융사에 보냈다. 일단은 피해가 집중된 인천 미추홀구의 주택 주소가 대부분인데, 당국 관계자는 "다른 지역의 피해 주택들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을 비롯해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법무부 등이 폭넓게 참여하는 전세사기 피해지원 범부처TF는 같은 날 첫 회의에서 경매·매각 처분 자율 유예 방안을 공유하고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자로 확인된 2479세대 가운데 은행권과 상호금융권 등에서 보유 중인 대출분에 대해선 20일부터 즉시 경매를 유예하도록 협조를 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엔 은행연합회와 신협·수협중앙회, 새마을금고중앙회 관계자도 참석했다.
이번 조치를 요구 받은 금융사들 내부에선 부담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전세 사기 주택 관련 채권은 은행권보다 비은행권에서 비중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사 관계자는 "조기에 대출 채권을 회수하지 않고 경매 조치를 미루게 되면 연체를 감당하면서 포기해야 하는 이자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유예 기간 동안 연체율이 올라가고 건전성도 악화될 수 있다"고 했다.
부실 채권 회수 노력을 제 때 하지 않을 경우 배임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어 금감원은 '유예 조치 시 금융 관련 법규를 위반한 것으로 보기 어려워 제재 대상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비조치의견서를 금융사에 보내기도 했다. 금융위도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이처럼 일부 고민 기류도 감지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무분별하게 대출을 실행한 금융사에도 이번 사태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문제가 없는 주택인지, 집값과 보증금의 차이는 얼마인지, 임대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등을 세세하게 따져보지 않고 금융사가 마구 대출을 해준 측면도 있다고 본다"며 "이런 식으로 대출이 수월하게 이뤄지도록 한 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나온 금융사 자율 유예 조치는 말 그대로 주택의 처분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이어서 보다 근본적인 피해자 보호책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 차원의 논의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경매가 이뤄질 경우 피해 임차인에게 해당 주택을 먼저 매수할 수 있는 우선권을 부여하고 매수에 필요한 자금을 장기 저리로 대출해주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한편 지난 2월부터 인천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나서야 이 같은 긴급 대응책이 가동되는 것을 두고 '뒷북 조치'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인천시는 미추홀구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로 지난달 말 기준 주택 1523호가 임의 경매(담보권 실행 경매) 절차를 밟고 있고 87호는 매각됐다고 밝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비극적인 사고가 생긴 이후에야 국가가 그동안 검토 단계에 있던 대책을 앞당겨 하게 된 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있고,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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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박성완 기자 pswwan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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