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일본 노래로 세월호 추모하며 남 이마엔 親日딱지
일본 국민 애창곡으로 매년 세월호 기념 행사… 親日까지 내로남불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2030 엑스포 유치 지원을 위해 부산에 갔다가 만찬 행사를 가진 횟집이 친일(親日) 논란에 휩싸이며 불매 운동 대상이 됐다. 친야(親野) 성향 유튜브 채널이 횟집 이름 ‘일광(日光)’을 문제 삼았다. 부산 기장군 일광읍 명칭이 일제 시대 때 붙여졌으며, 일광이라는 단어가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 모양을 연상시킨다는 주장이다. 일광읍 주민 2만8000여 명과 전국 각지에서 고향 이름을 따 ‘일광 횟집’ 또는 ‘일광 수산’을 운영하는 식당 주인들이 졸지에 친일 세력이 됐다.
기장군이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일광읍 명칭은 기장군 소재 일광산에서 따온 것이며, 인조 6년(1638년) 지어진 기장 향교 상량문에도 일광산이 적혀 있는 만큼 일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고증이 동원되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백번 양보해서 일광이라는 지명이 일본 사람 머리에서 나왔다고 치자. 그렇다고 일광산에 등산하고, 일광 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고, 햇볕 쬐는 일광욕(日光浴)을 친일 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야권은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강제 징용 해법을 내놓은 것을 비난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윤 대통령 행적 하나하나에 친일(親日) 딱지를 붙이려 아이디어를 짜낸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윤 대통령이 방일 때 기시다 일본 총리와 친교의 시간을 가진 오무라이스 전문점 렌가테이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장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역사의 맥락을 모르면 일본에 당한다”고 했다.
서울 용산공원에서 백범 김구 기념관까지는 5㎞다. 스쿨존 제한 속도 30㎞로 주행해도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용산공원터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왜군의 보급기지였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주둔했으며, 러일 전쟁을 거치며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자리 잡았던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김구 기념관도 친일 시설로 봐야 하나.
50년 민주세력에 뿌리를 둔 지금의 야권은 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국정(國政) DNA가 거세된 정쟁 집단으로 변질됐다. 오로지 ‘친일 낙인 찍기’와 ‘재난 덤터기 씌우기’로 상대 정파를 비난하는 기능만 작동한다. 문 전 대통령은 “친일 청산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라고 했고 팽목항 세월호 현장에선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고 썼다. 그런데 야권의 정체성처럼 돼 버린 이 두 가지 신조가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난주 광주와 전남 교육청의 세월호 9주기 추모 행사에서 ‘천 개의 바람이 되어’가 연주됐다. 작년 8주기 때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띄워진 동영상, 민주당 의원들의 세월호 관련 인터뷰에 배경으로 깔린 음악도 이 노래였다.
‘천 개의 바람’은 팝페라 가수 임형주씨의 2009년 2월 앨범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음반이 출시된 날이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일과 겹치면서 추모곡으로 헌정됐다. 그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세월호, 핼러윈 참사 같은 국가적 비극을 위로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이 노래는 일본 작곡가 아라이 만의 센노 가제니 나테(千の風になって)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미국의 작가 미상 추모시에 멜로디를 입힌 노래다. 일본 팝페라 가수가 연말 가요제인 NHK 홍백가합전에서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발매된 싱글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렸다. 이 노래를 만들게 된 영감을 줬다는 홋카이도 오누마 공원 간판에는 ‘센노 가제니 나테’의 탄생지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그만큼 일본에서 잘 알려진 노래다. 한국어판 ‘천 개의 바람’ 수익금의 절반은 일본 작곡가와 음원사 몫이다. 임형주씨는 한국 측 수익금을 세월호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기부했다.
미국 작곡가가 똑 같은 추모시 가사로 교회 성가를 만든 버전도 있다. 제목은 추모시 첫 줄인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다. 미국과 유럽에서 중고생 성가대가 합창하는 유튜브 동영상이 여럿 떠있다. 마치 먼저 떠난 동년배 단원고 학생들을 위해 불러주는 노래 같다. 일본 가요가 가볍게 귀에 꽂힌다면, 미국 성가는 무겁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일본 것도 미국 것도 나름의 울림이 있었다. 노래가 위로만 줄 수 있다면 국적을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다만 평소에 일본 근처에만 가도 병균에 옮는 것처럼 남의 이마에 친일(親日) 딱지를 붙여온 사람들이 일본 작곡가가 만든 일본 국민의 애창곡으로 세월호를 추모하는 광경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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