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도 히치콕도 사랑한… 영화 같은 호퍼의 작품들 왔다
여름날 해안가의 집, 흰색 외벽 위로 오전의 햇살이 떨어진다. 뾰족한 두 지붕, 새하얀 건물과 푸른 자연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이 그림은 어딘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긴다. 백발의 중년 여성과 난간에 걸터 앉은 젊은 금발 여인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둘은 무슨 관계일까. 에드워드 호퍼(Hopper·1882~1967)가 1960년 9월 완성한 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밝힌 ‘이층에 내리는 햇빛’이다. 호퍼는 “노란색을 거의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햇빛을 흰색만으로 그려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라고 했다.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대거 한국에 상륙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일 개막하는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호퍼의 개인전이다. 호퍼 작품의 최대 소장처인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공동 기획해 서소문본관 전 층에 걸쳐 개최되는 블록버스터 전시다. 회화·드로잉·판화 등 호퍼 작품 160점과 관련 아카이브 110여점을 소개한다.
◇불안과 고독, 현대인의 내면 풍경
화려한 대도시 이면에 드리워진 고독과 불안을 사실적으로 그려온 화가다. 철길 옆에 우뚝 선 신호탑 뒤로 장관을 이루는 일몰을 묘사한 ‘철길의 석양’은 이번 전시 주제를 관통하는 대표작이다. 근대화의 산물인 철길이 지평선과 평행을 이루며 끝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아련한 느낌을 준다. 기차 창문 너머로 목격한 장면 같지만, 실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풍경이다.
빛과 그림자는 호퍼의 작품을 설명하는 열쇳말. 도시를 밝히는 불빛과 텅 빈 거리, 극장과 식당,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앉아있는 실내 인물을 관찰자적 시선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감춰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극장을 찾을 만큼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둠이 깔린 도시, 내려다보듯 한 남성의 걸음을 쫓는 판화 ‘밤의 그림자’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릴 넘친다. 관음증적 시선, 고독과 우울의 정서가 실제 누아르 영화에 영향을 줬다. 알프레드 히치콕, 빔 벤더스, 데이비드 린치 같은 거장들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오바마 집무실에 걸린 그림도
전시는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 등 작가가 선호한 장소를 따라 간다.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거듭하며 지평을 넓혀간 호퍼의 65년 화업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 걸고 감상했던 ‘벌리콥의 집, 사우스 트루로’도 볼 수 있다. 2014년 2월 휘트니미술관에서 대여한 호퍼 그림 두 점 중 하나다. 호퍼 부부는 1930년 여름, 케이프코드 남쪽 트루로에 방문해 우체국장 벌리 콥의 작은 집을 빌려 여름 휴가를 보냈다. 휘트니미술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호퍼 작품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 그림을 골랐다”며 “작품을 백악관에 걸던 날, 집무실로 쏟아진 자연광이 호퍼 그림의 햇빛과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홈페이지에 올렸다.
호퍼는 주로 한 여성을 모델로 그렸다. 그의 아내 조세핀이다. ‘햇빛 속의 여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여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여인이 방 한가운데 서 있다. 강렬하고 밝은 햇빛이 방 한가운데까지 넘어와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그림이다. 촉망 받는 화가였던 조세핀은 평생 호퍼의 모델이자 동반자, 매니저 역할을 했다. 둘은 성격 차로 자주 다퉜지만, 문학이나 영화, 연극 같은 취향을 공유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았다.
‘철길의 석양’ 한 점을 제외한 전 작품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다. 작품을 그린 장소, 사용한 물감, 판매 기록까지 스케치와 함께 꼼꼼하게 기록한 장부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애덤 와인버그 휘트니미술관장은 “호퍼는 여러 장소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자신만의 기억과 상상력을 더해 자기만의 화풍을 발전시켰다”며 “현대인의 내면 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이 서울의 관람객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8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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