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생태계 붕괴시킨 文정부, 전기료 인상 늦춘 尹정부
한국전력은 작년 32조원 영업 손실을 냈다. 올해 1분기엔 5조원 손실이 예상된다. 이대로면 올해에도 12조~14조원 적자가 예상된다. 2020년 자기자본 57조원이 넘던 한전은 2년 만에 22조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잘못된 에너지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당장 전기요금을 정상화하지 않으면 한전의 생존 자체가 풍전등화다. 하지만 최근 전기요금 인상 발표가 전날 전격 취소되는 등 요금 정상화는 정치에 막혀 난항을 겪고 있다.
한전 부실 문제는 한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그 충격은 한전과 발전 공기업, 민간 발전사 부실로 이어져 우리나라 전력 산업 생태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또 송·배전 등 전력망에 대한 투자 부실은 블랙아웃(대정전) 위험을 키우고, 반도체·철강·정유 등 제조업 기반의 전력 다(多)소비국인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값싼 전기요금은 국제 통상 분쟁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전기요금이 전력망 붕괴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 안보와 경제·산업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19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천문학적 적자를 낸 한전은 애초 올해 kWh(킬로와트시)당 51.6원을 올려야 2025~2026년에는 누적 적자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지난 1월 4분의 1 수준인 kWh당 13.1원만 올리고 멈춘 상태다. 에어컨 전력 수요가 많아지는 3분기, 난방비 부담이 커지는 4분기, 총선이 있는 내년 상반기에 전기요금을 올리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다. 결국 4월이 요금 정상화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지금 올리지 않으면 문제는 한전이나 산업계에 그치지 않고 전력 산업발 금융 위기로 확산할 우려가 크다”며 “3분기, 4분기로 갈수록 위기는 증폭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정부의 무모한 에너지 정책 실패를 윤석열 정부가 빠른 시간에 바로잡지 못하면 한전 부실의 최종 책임은 현 정부의 유산이 된다. 전력업계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가 이전 정부가 던진 폭탄이라는 이유로 문제 해결을 외면한다면 모든 책임은 윤 정부가 져야 할 것”이라며 “고통스럽더라도 요금을 정상화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지금은 해결에 나설 때이지 문제를 덮고, 결정을 뒤로 미룰 때가 아니다”라며 “포퓰리즘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린다면 여론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빚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한전과 가스공사가 하루에 내는 이자만 5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 한전은 발전사에서 지금도 100원에 전기를 사 와 70원에 팔고 있다. 유럽발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던 2021년 12월, 판매 단가 대비 kWh당 10원가량 웃돌기 시작한 한전의 전기 구입 단가는 올 2월에도 15원가량 밑지고 파는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발전사 경영 위기
왜곡된 전기요금은 열병합발전업체부터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전기를 사고 지급하는 전기 도매 가격(SMP)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SMP 상한제’를 도입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한전이 제도 시행으로 줄인 지출은 지난해 12월에만 7000억원 수준이다. 천문학적인 한전 적자를 메우지도 못하면서 발전사 수입은 줄었고, 규모가 작은 열병합발전사들은 적자로 돌아섰다.
발전 공기업들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자금난에 처한 한전이 외상 거래를 가능하게 규정을 바꾸고, 공기업에 지급하는 전력 단가를 낮추면서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원전 24기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해 원전 발전량(17만6054GWh)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한전이 지나치게 싼 단가로 전기를 구입한 탓에 620억원 적자를 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적자가 누적되면서 열병합발전소 약 30곳 가운데 2~3곳은 자금 사정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발전 공기업도 자금난이 더 심해지면 석탄 같은 연료를 제때 들여오지 못할 우려도 크다”고 말했다.
◇한전, “민간 기업이라면 이미 폐업”… 블랙아웃 우려까지
한전부터 발전사까지 투자를 멈추면서 중견·중소 협력업체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 김지곤 한국전력산업중소사업자협회 회장은 “한전과 계열사들이 신규 발주를 멈추면서 중소·중견 업체들의 매출이 반 토막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했다. 한전은 올해부터 2036년까지 송배전망에 56조원을 투자해야 하지만 쪼그라든 살림살이에 사실상 올스톱 상태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해마다 송배전망이 확대되면서 투자비는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난해는 4000억원 가까이 줄었다”며 “전력 시설이 노후화하는 가운데 신규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블랙아웃 우려까지 제기된다”고 했다. 기존 송배전망의 유지·보수가 늦어지고, 관련 업체들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면 수시로 정전이 일어나던 1970~1980년대 상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력망이 불안해지면 반도체·철강·석유화학·정유 등 국내 대표 업체들의 산업 경쟁력 약화도 우려된다. 365일, 24시간 생산하는 이 제품들의 특성상 일분일초만 정전이 일어나도 수십억, 수백억원에 이르는 피해가 일어나기 쉽다. 경기 용인에 새로 짓는 반도체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하려면 원전 4기에 해당하는 4GW(기가와트) 규모 생산 설비와 송배전망이 필요하지만, 투자는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전기요금 정상화가 늦춰지면 한전은 빚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한전이 19일까지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9조원가량으로 남은 기간 작년처럼 발행이 이어진다면 지난해 말에 이어 또 한번 회사채 한도 확대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든 공기업이 무작정 빚을 내도록 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강승진 한국공학대 교수는 “민간 기업이었다면 한전은 이미 2021년 대규모 적자 당시에 파산했어야 한다”며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두고 한전이 빚으로 연명하게 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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