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사기, 깡통전세와 달라… 건설업자·중개사·브로커 결탁해 ‘보증금 착취’

이성훈 기자 2023. 4.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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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0채 전세사기 어떻게 가능했나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한 것으로 알려진 인천시 미추홀구 모 아파트. 건축업자 A(62)씨 등은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327채의 전세 보증금 266억원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 등을 받고 있다./연합뉴스

한 명의 지역 건설업자가 2800여 채 주택을 소유하며 2700억원이 넘는 보증금 피해를 입혀,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현재도 전국 곳곳에서 유사한 전세 사기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전세 사기의 구조를 뜯어 봤다.

‘전세 사기’는 일명 ‘깡통 전세’와는 전혀 다르다. 깡통 전세는 주택 매매가격보다 전세 보증금이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집주인(임대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택 가격이 급락할 때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세입자(임차인)가 리스크(위험)를 감당해야 한다. 반면 ‘전세 사기’는 집주인이 의도적으로 세입자를 속여 보증금을 갈취하는 것이다.

최근 드러난 전세 사기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미추홀 건축왕’ 전세 사기처럼 부동산 중개업소와 공모해 세입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후, 보증금을 갚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입자가 내는 전세금만으로 빌라를 매입(무자본 갭투자)한 후, 신용불량자 등 ‘바지 임대인’에게 명의를 넘기고 사라지는 이른바 ‘빌라왕’ 사건의 경우다. 이는 더 이상 집주인으로서 보증금 반환 등의 책임이 사라진 상황에서 전세금만 챙겨 달아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건축업자와 공인중개사, 세입자를 모집하는 브로커 등이 조직적으로 공모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2030 세대가 이들을 당해내는 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미추홀 전세 사기, 어떻게 가능했나

미추홀 ‘건축왕’ 전세 사기 사건의 피의자인 남모(62)씨는 현재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사건의 실체는 재판을 통해 가려지겠지만, 현재까지는 지역 건설업자와 공인중개사가 결탁해 세입자를 속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남씨는 2010년대 들어 인천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주택사업을 벌였다. 빌라와 소규모 아파트를 지은 후, 이를 담보로 은행 등에서 최대 한도로 돈을 빌렸다. 이 자금으로 빌라·아파트를 또 짓고, 이를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았다. 이런 방법을 반복하며 2800여 채를 짓고, 세입자들을 들였다. 대출금과 보증금이 쌓였지만, 남씨는 나중에 빌라 가격이 오르면, 이를 갚고도 차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은행 대출(근저당)이 있는 집은 전세를 놓기 쉽지 않다. 은행 대출이 선순위 채권이기 때문이다. 보통 공인중개사는 전세 계약 당일 발부받은 등기부등본으로 은행 대출 여부를 확인시켜 주고, 위험성을 고지한다. 하지만 이번 ‘전세 사기’의 경우는 달랐다.

남씨와 계약 관계를 맺은 공인중개사들은 “은행 대출이 있지만, 보증금에는 문제가 없다”고 세입자를 안심시켰다. 보증금 1억원에 세입자를 들이면서, “빌라 시세가 3억원이고, 은행 대출이 1억5000만원이다. 빌라를 팔면 대출을 상환해도 보증금은 문제없다”는 식으로 계약을 유도하며, ‘문제가 생기면 보증금을 책임지겠다’는 내용의 합의서까지 써줬다. 하지만 빌라 전셋값이 계속 떨어지면서,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이전 세입자의 보증금을 내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경매로 넘어간 빌라의 낙찰가율은 시세의 50~60%에 불과했다. 더구나 밀린 세금 등 다른 선순위 채권이 있으면, 세입자는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공인중개사가 쓴 합의서도 법적 효력은 없었다.

◇'바지 임대인’ 내세운 후 잠적

1100채가 넘는 빌라·오피스텔을 임대했다가 사망한 ‘빌라왕’의 전세사기 같은 유형은 채무변제 능력이 없는 ‘바지 임대인’을 내세운 경우다. 빌라는 아파트와 달리 시세 파악이 어렵다. 이를 악용해 임대인은 세입자로부터 받은 보증금으로 자신의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빌라를 매입한 후, 세입자와 전세 계약을 맺었다. 이후 계약 기간 중 변제 능력이 없는 신용불량자 앞으로 해당 빌라의 명의를 이전한다. 하지만 세입자는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빌라왕 전세 사기’ 사건의 한 피해자는 “집 수도꼭지가 고장 나 집주인에게 전화했더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공인중개사를 찾아간 후에야 주인이 바뀐 것을 알았다”고 했다.

이 경우 세입자가 집을 경매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보증금이 매매가격보다 많기 때문에, 보증금을 온전히 회수할 수 없다. 김광석 리얼하우스 대표는 “부동산 전문 업자들이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에, 부동산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2030 세대가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깡통 전세와 역전세

깡통 전세는 매매 가격이 전세 보증금 이하로 떨어져 집을 팔아도 보증금 반환이 불가능한 집을 말한다. 역전세는 전셋값이 크게 떨어져, 집주인이 나가는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줄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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