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제대로 번복하고 반복하기
뉴스를 볼 때마다 힘이 빠진다. “그 말이 아니고”를 전달하는 기사들을 읽노라면, 정치인은 ‘번복’에 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이 난데없이 ‘이 말’로 둔갑하기도 하고, ‘전면 반대’라는 입장이 ‘유보’로 변동되기도 한다. 그때의 그 말이 아예 없었다고 잡아떼는 일은 물론, ‘전면 반대’라는 입장은 와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시간으로 뒤집히는 진술과 방침 때문에 무기력이 부표처럼 떠다닌다. 국민을 상대로 간을 보는 것 같아 울화통이 치민다. 틀리면 바로잡는 게 옳겠으나, 핑계를 위한 핑계만 양산한다는 혐의가 짙다. 번복은 은닉을 위해 반복되고, 거듭되는 반복은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반복의 힘은 무섭다. 운동선수가 국제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콩나물을 다듬을 수 있는 것도 다 반복의 힘 덕분이다. 무언가를 반복하면 능숙해진다. 으레 하던 일을 다시 할 적에 든든한 지원군처럼 자신감과 안정감이 뒤따른다. 좋은 쪽으로만 힘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약속시간마다 몇 분씩 늦는 습관은 제시간에 출발하는 열차를 놓치게 할지도 모른다. 거짓말이 반복되고 그것을 운 좋게 들키지 않으면 남을 속이는 일에 하등의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관행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염치없는 줄 알지 못한 채 갈수록 뻔뻔해지게 된다.
지난 며칠 몸이 좋지 않아 산책하지 못했다. 잠시 걷기를 멈추었는데도 다시 걸으려고 보니 몸이 생각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사흘이었는데 그새 리듬이 깨져버린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간 책을 읽지 않았는데, 다시 펼친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이었는데 눈이 따라가는 문장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백지를 마주하니 감감하고 막막했다. 기껏해야 한 달이었는데 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가 툭툭 끊겨 당황하기도 했다. 넉넉잡아 1년이었는데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일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반복하지 않으면 심신은 금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어떤 일을 하는 심신은 반복함으로써 겨우 만들어지지만, 편한 상태를 지향하는 심신은 번복하듯 그것을 뒤엎어버린다.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대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극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굳어버린 마음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반복하지 않아 이전 상태를 벗어났을 때, 반복의 힘은 역설적으로 더 절실해진다. 하루면 리듬을 되찾는 일도 있지만, 보통은 원래 들였던 노력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걷기와 읽기와 쓰기와 듣기와 말하기, 일과를 가득 채우던 일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올해 초부터 작성한 메모를 들여다본다. 깨알같이 적힌 낱말과 문장 사이를 파고들다 보니 그때 나를 자극했던 풍경이 슬며시 눈앞에 펼쳐진다. 메모하기 시작하는 습관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뛸 듯이 기뻐했는데, 다음날 보니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휘발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날이었다. 메모장마저도 4월 들어서는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번복하고 반복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심신을 다잡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이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 나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수하면 번복하고 묵묵히 반복해야 한다. 탁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삶 앞에서 탁월한 거짓말쟁이가 되는 일은 얼마나 끔찍한가.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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