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93] 있으면 어색한 ‘있다’

양해원 글지기 대표 2023. 4.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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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있네. 언행이 얼토당토않다 여길 때 흔히 하는 말이다. 맘에 없는 소리, 눈꼴사납거나 분수에 안 맞는 행동이다 싶을 때도 그런다. 비슷하게 ‘놀고 있네’도 쓰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아예 ‘놀다’ 뜻풀이의 하나로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함을 비꼬는 말’을 올렸다. 아무튼 ‘웃기네’ ‘노네’ 해도 그만인데 주로 ‘-고 있다’로 표현한다. 행동이 이어짐을 나타내는 말뜻이 강조를 좋아하는 구어체에 맞았으리라.

활자 매체는 어떨까. ‘정부는 인권을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존중하고 있다.’ ‘존중’은 마음 작용이지 물리적 동작이 아니다. 그러니 행동의 지속을 보여주는 어구(語句) ‘존중하고 있다’ 대신 ‘존중한다’가 어울린다. ‘눈부신 햇살에서 공기가 맑음을 느끼고 있다’ ‘아군이 자기들을 공격한다고 믿고 있다’ 같은 문장도 ‘느낀다’ ‘믿는다’가 자연스럽다. 알다, 모르다, 기대하다, 판단하다, 비판하다 같은 동사가 그렇다. 대체로 동작성이 없거나 약한 말인데, 동작성이 있으면 그럼?

잘못 쓴 안내문을 지적한 글을 보자. ‘문법에 어긋나는 영어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표기’는 동작이되 과거 일이므로 진행형이 될 수 없다. ‘표기하다’를 순우리말로 옮겨 ‘영어로 적고 있다’ 해보면 어색함이 잘 드러난다(’표기한 것도’ O).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거 시내 매장에서 팔고 있다’ ‘지금을 위기로 보고 있다’…. 모두 동작성 동사지만 ‘돌아간다’ ‘판다’ ‘본다’ 해도 문맥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있다’를 무턱대고 안 쓸 순 없다. ‘쏟아지는 흙더미를 몸으로 막고 있다’ ‘그림에서 그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처럼 써야 하는 문맥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쓸 땐 쓰되 군더더기는 좀 거르자는 얘기다.

대통령실 수석이 ‘웃기고 있네’라고 끄적여 혼난 적이 있다.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 발언을 듣다 그랬으니 욕먹어 싸지.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공직자가 많아야 할 텐데. 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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