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더 보여드릴 유적이 남아 있사옵니다
- 400억 들여 만든 '한산대첩 광장'
- 고증 생생한 전투군상 조형물 눈길
- 바닷가 언덕 주택가 자리한 '착량묘'
- 아담한 고택에 장군의 넋 깃들어
- 멀리서 쳐다만보던 '한산대첩기념비'
- 실제 올라보니 그 기개에 감개무량
- 28일 충무공 탄생 478주년 맞아
- 몰랐던, 혹은 익숙한 유적 톺아보기
자동차가 통영으로 들어설 즈음, 일행 가운데 사진 촬영과 운전을 책임진 동료가 물었다. “어디부터 갈까요?”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었는데도, 일정표 짜기를 도맡았던 또 다른 일행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느긋해 보였다. 통영 곳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많고 찾아가기에도 어렵지 않다고 그가 설명했다. 가랑비가 좀 온다고 해도 별로 긴장할 일은 아니란다.
“우선, 강구안으로 갑시다!” 그가 제안했다. 통영을 여행할 때, 강구안은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친수공간이자 광장이고 요충지여서 사람이 몰린다. 강구안은 이번 ‘통영 이순신 장군 유적 기행’의 출발지가 될 터였다. 올해 이순신 장군 탄생 478주년이 되는 4월 28일을 한 달 앞둔 어느 주말의 1박2일 여정이었다.
▮강구안의 판옥선·거북선
멋스럽고 평온한 포구이기도 한 강구안에는 판옥선과 거북선 복원 모형이 여러 척 물 위에 떠 있다. 입장료를 내면 판옥선과 거북선 안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여수의 이순신 광장에 있는 거북선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던 터라, 망설이다 내부 관람은 하지 않았는데 좀 후회스럽다.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면서 써 내려간 ‘난중일기’(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를 찾아보았다.
“한산도에서 새로 만든 배를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가서 끌어왔다.”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서 걸려 적에게 습격당한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이에 거북선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여 천자와 지자 총통을 연이어 쏘아대고, 여러 배들이 동시에 함께 진격하여….” 이 기록에 나오는 우리 수군의 전선이 판옥선과 거북선이다. 장군이 얼마나 판옥선과 거북선을 아끼고 중시했는지 절절하게 느꼈다. 그 실물이 강구안 바다에 떠 있다.
▮항남동 한산대첩광장
한산대첩광장은 강구안 바로 곁 항남동 바닷가에 있다. 차를 서호시장 쪽으로 몰자마자 도착했다. 일명 ‘한산대첩 병선마당’이다. 2017년 8월 준공했는데, 통영 지역 언론의 보도를 찾아보니 400억 원이 넘는 사업비(국·도·시비)가 든 이 광장을 어떻게 조성하고 어떻게 운영할지 많이들 고민하고 토론했다. 처음으로 가본 한산대첩광장의 인상은 ‘와보기를 잘했다’였다. 정성을 느꼈다.
광장에는 ‘한산대첩 전투 군상’이라는 매우 규모가 큰 조형물이 있다.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산대첩에서 싸운 사부·포수·기수·나팔수·고수·격군 등을 형상화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 조형물은 조악해질 수 있다. ‘한산대첩 전투군상’ 조형물은 고증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균형감·활력을 표현했다. 광장을 둘러싼 이순신 장군의 글씨와 어록 조형물도 함께 둘러볼 만했다.
▮착량묘와 충렬사
착량묘(鑿梁廟)와 충렬사는 참으로 인상 깊었다. 통영시 당동의 바닷가 언덕 주택가에 자리한 착량묘에는 처음 가봤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서 통영에 왔거나, 그냥 여행 삼아 이 아름다운 고장에 들렀을 때 착량묘에 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다. 통영해저터널 근처인데, 막상 여기까지 오면 통영해저터널에만 정신을 뺏겼다. 아! 이곳에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구나 하는 ‘깨우침’ 같은 기분이 먼저 들었다.
착량묘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고자 수군과 지역민이 1599년 세웠다. 1599년이면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장군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지은 ‘이순신 사당의 효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초막으로 지어 봄·가을로 제사를 모셨는데, 1877년 장군의 10세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가꾸었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착량묘에 비가 내렸다. 돌을 깔아놓은 마당이 반들반들 빛났다. 아담한 고택에 이순신 장군의 넋이 깃들었음을 느꼈다.
‘명정동의 충렬사는 전에 가 봤으니 이번엔 안 가 봐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통영에 올 때면 하곤 했다. 이번 여행길에 통영 충렬사에 오랜만에 갔다. 거기서 젊은 여행객들을 만났다. ‘한국인의 여행 DNA 같은 것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절이나 사당에 가면 큰 볼거리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적다. 그런데도 여행길에서 남녀노소 삼삼오오 곧잘 절이나 사당에 간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의 경건함과 고즈넉함은 어떠하겠는가. 특히 이곳의 전시관에는 ‘이충무공전서’ 등 귀한 유물이 많아 아주 유익했다.
▮문어포 한산대첩기념비·제승당
서호동 통영여객선터미널에 가서 카페리를 타고 한산도로 들어갔다. 깜빡 잊고 신분증 될 만한 것을 안 가져가 터미널에 있는 ‘자판기’에서 유료로 주민등록초본을 떼서 제시해야 했다. 한산도 가는 배는 자주 있고 25~30분밖에 안 걸리니 마음이 편했다. 승선객이 많아 배는 북적였다. 아! 그 아름다운 ‘제승당 가는 길’을 다시 걷는가 하는 생각에 설��다. 제승당 가는 길은 바닷물이 길을 적실 듯 바로 곁에서 찰랑댄다.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한산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이곳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오래 주둔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한 고조 유방이 빼어난 참모 장량(장자방)을 두고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 결승천리지외(決勝千里之外)’라고 표현한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은 ‘사기’의 이 대목을 높이 샀는지 한산도 군영에 운주당을 만들어 거처했다. 사람들은 장군의 영정에 참배한 뒤 수루에도 올랐다.
취재팀 일행은 한산도 가는 카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갔다. 그 덕분에 문어포(問語浦)로 갈 수 있었다. 배를 타고 한산도로 들어올 때, 한산도에서 배를 타고 나갈 때 문어포 높은 언덕에 있는 한산대첩기념비(1979년 건립)는 아주 잘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곳으로 가려면 구불구불 섬 한가운데로 이어진 길을 돌아가야 하고 마을 사이로 난 좁은 오르막을 거쳐야 한다. 자동차를 몰고 가지 않는다면, 가는 길은 만만찮게 어렵다.
문어포 한산대첩기념비는 높은 곳에 있다. 한산도 앞바다를 향해 열린 바다 조망이 탁월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숲도 울창했고 새 소리가 맑았다. 언제나 멀리서 쳐다보던 한산대첩 기념비를 난생 처음 가까이서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지금에야 찾아오다니.
▮정량동 이순신공원
마지막 여정은 정량동 이순신공원으로 잡았다.한산도에서 배를 타고 통영시내로 되돌아 나왔다. 통영항 동쪽을 끼고 차를 달렸다. 정량동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이순신 공원은 무엇보다 바다를 향해 열린 장쾌한 조망이 빼어나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높은 곳에 서서 남해를 굽어보는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 널찍하고 편의시설이 좋으며 해안산책길도 잘 가꿔놓아 관광객과 시민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완연히 자리 잡은 듯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흐뭇하게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