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아영 기자 2023. 4.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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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흑인 여성이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뛰고 또 뛴다. 1960년대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최초로 일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의 장면이다. 캐서린 존슨은 로켓 개발을 위해 아무도 할 수 없는 계산을 해내지만 흑인 여성이기에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심지어 공용 커피포트조차 쓸 수 없다. “이곳엔 제가 갈 화장실이 없습니다. 서관 전체에도 없어서 800m를 나가야 해요. 알고 계셨어요?” 어느 비 오는 날 캐서린은 “필요할 때마다 안 보이던데 대체 매일 어딜 가는 거야”라며 성내며 묻는 백인 상사에게 흠뻑 젖은 채 울부짖듯 답한다. “죄송하지만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2023년 한국의 현대자동차 공장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화장실은 ‘가기 힘든 곳’이다. 남성들만 있던 공장, 여성 화장실이 거의 없었다.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불법 파견이라는 법원 판결 이후 정규직화되자 ‘화장실 이슈’가 생겨났다. 이제 여성 300여명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5년쯤 지났지만 노조가 여성 조합원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면 아직도 건의사항의 절반이 화장실과 탈의실 문제다.

처음에 회사는 남성 화장실에 남성들이 없을 때 틈틈이 들어가라고 했다. 그다음에는 제일 안쪽 칸을 ‘여성 칸’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여성 화장실로 분리됐지만 각 라인에 배치된 여성들이 가기엔 멀다. 여성들이 공장 끝쪽에 있는 화장실로 몰리기 때문에 10분의 휴식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공장이 워낙 크니까 가는 데 2분, 오는 데 2분이 걸리는데 어떤 날은 줄 서서 기다리다 손도 못 씻고 와요. 작년 대의원대회에서 긴급하게 볼일은 봐야 하지 않느냐고 요구했지만 장소를 1년 넘게 찾다가 구했는데도 예산이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회사보다 남성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렵다. “한 남성 조합원이 자신의 딸이 와도, 손녀가 와도 화장실을 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소수니까 참으라는 거예요.” 영화에서 캐서린은 동료들의 계산을 확인하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지만 백인 남성은 그가 확인할 수 없게 숫자를 지워서 준다. 캐서린이 형광등에 종이를 비춰 숫자를 일일이 확인하는 장면에서 여성들이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남성 조합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겹쳐졌다. 현대차뿐 아니다. 기아는 2013~2017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여성을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당시 정규직 노조는 “준비 없는 여성 정규직화는 혼란을 키운다”며 여성 화장실, 탈의실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반대했다.

어떤 이들은 화장실처럼 기본적인 것도 투쟁으로 얻어야 한다. 이동권은 또 어떠한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동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그전에는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임신을 하고 뛸 수 없게 되어서야 횡단보도의 파란 신호등 길이가 짧다는 생각을 했고, 지하철에서 잡을 곳이 마땅치 않고 어른들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비틀거리는 아이들을 낳고서야 이 사회는 아동에게 불친절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를 보는 게 괴로웠다. 대중교통으로 원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욕망이 ‘투쟁’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그 정도 과격한 목소리를 내어야 조명해주는 사회에서, 투쟁 방식만 몰아붙이며 그들은 소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말이다.

비장애인의 출근이 장애인들의 기본권보다 중요한가?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다는 말에 “당신은 소수니까 참으라”고 말하고 싶은가?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로 간단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사회의 소수자성은 젠더와 계급, 인종 등을 수없이 교차하면서 발현된다. 영화에서 흑인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백인 남성들만이 아니다. 캐서린에게 ‘무릎길이 치마, 힐, 심플한 진주 목걸이’라는 복무 규정 준수를 강조하는 사람은 백인 여성이다. 그 또한 ‘목걸이를 살 수 없는’ 흑인 여성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딴 목걸이 없어요. 흑인에게 진주 목걸이 살 월급을 주긴 해요?” 캐서린이 물을때 백인 여성의 표정은 당황스럽다.

나 또한 누군가보다 주류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면 사회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우선 당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소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싶다면 화장실을 찾아보자. 남성 화장실만 있거나 남성 화장실이 더 많은가. 그리고 장애인 화장실은 있는가. 꼭 화장실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공기처럼 쓰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 높이고 싸워야 겨우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는가.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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