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강릉의 봄

기자 2023. 4.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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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산불이 났다. 사천해수욕장에서 아래쪽 경포대 인근까지 퍼진 큰불이었다. 충남 홍성과 서울 인왕산에서도 산불이 났다. 슬픈 일이다. 강릉에서는 강한 바람이라는 변수가 있었다지만 기본적으로 산불은 건조한 날씨와 관련이 깊다. 올봄 비가 오지 않아 건조했다는 말은 곧 공기 중에 수증기량이 적었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증기압 결핍(vapor pressure deficit)’이라는 용어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양이 충분해서 포화 상태에 이르면 수증기는 이슬로 바뀐다. 새벽녘 잎에 맺힌 이슬이 그것이다. 실제로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의 양과 포화 상태일 때 수증기량의 차이가 곧 증기압 결핍이다. 문제는 온도가 올라갈수록 증기압 결핍이 커진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증기압 결핍은 기후변화와 연결된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2020년 스위스 연구진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증기압 결핍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땅속의 물을 끌어 대기 중으로 뿜는 증기의 양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이 분석한 여러 곳 중 한국과 일본의 증기압 결핍이 1등이었다. 증기압 결핍이 커질수록 지하수와 대기 수증기의 직선 행로에 자리한 식물이 일차적인 피해자가 된다. 잎 뒷면의 기공을 거쳐 물이 증산하면 식물은 물 스트레스가 커진다. 북미 서부의 삼림을 태우고 강릉의 봄을 앗아간 산불의 이면에 이런 수증기 동역학이 숨어 있는 셈이다. 산불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 물이 줄면 식물이 말라죽을 위험이 늘어난다. 그럼 식물은 어찌할 것인가?

기공을 닫아 물의 증산을 억제하면 된다. 그러나 식물 내부 온도가 오르고 광합성 재료인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줄어드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식물에게 그나마 다행인 소식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이 늘었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잎의 기공 숫자가 줄어든 일은 지구 과학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변에 이산화탄소의 양이 많으면 기공을 만드는 데 드는 에너지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속도다. 대기의 수증기 요구량이 빠르게 늘어 기공이 줄어드는 속도를 넘어서는 순간 식물은 목말라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물 머무름 시간이 짧은 식물의 일차 생산성은 줄고 덩달아 대지는 말라간다. 여기에 산불이 가세한다. 열린 공간을 좋아하는 풀들은 분명 이런 상황을 환영할 것이다. 3000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떨어져나온 인도 대륙이 아시아 대륙 남단을 강타했을 때도 풀은 산불에 기대 자신의 영역을 넓혀 한때 지표면의 25%까지 점령한 적이 있었다. ‘반-나무’ 전략을 취한 초본 식물은 빠르게 자란다. 반면 우리 머리 위에서 수관(樹冠)의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나 활엽수림은 그러지 못한다.

강릉 산불이 진화될 무렵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지리산에 산불이 나지 않았던 까닭은 활엽수의 계획적 조림에 있다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시기는 대체로 3월 초순이다. 땅속에 저장해두었던 물과 탄수화물로 가지를 뻗고 잎을 틔우려는 나무에 구멍을 내는 인간의 행동을 두고 손뼉을 칠 마음은 없지만, 확실히 활엽수가 소나무 같은 상록 침엽수보다 물을 효과적으로 간직하는 듯 보인다. 나무 표면 가까운 곳에 자리한 물관에 물이 가득하다면 산불에도 내성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감이나 대추처럼 늦게 잎을 틔우는 식물이라면 사정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날의 건조한 기후라는 특수한 상황을 논외로 둔다면 대체로 활엽수가 침엽수보다 산불에 강하다고 한다. 활엽수에 송진 같은 인화성 화합물이 적은 것, 솔가리보다 활엽수 낙엽이 더 잘 분해되는 것 모두 활엽수에게 내화성을 부여한다. 알래스카 산불을 연구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 지역 침엽수림이 활엽수림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리 보면 산불은 풀과 활엽수의 친구다.

산불의 역사는 오래다. 4억년 전 고생대 숯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초기 식물도 불에 탔다. 불에 탄 식물은 연기를 냈고 그 연기를 발아 신호로 받아들인 식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중서부 사막에 자생하는 야생 담배는 산불이 난 뒤 급히 세력을 넓힌다. 나무를 서 있게 하는 리그닌 뼈대가 탄 연기 속 화합물이 담배의 싹을 틔우도록 돕기 때문이다. 언젠가 소나무와 단풍나무도 이런 고급 기술을 연마해낼지 모를 일이다.

강릉 소나무가 태양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 우주적 작업을 올해는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내년에도 봄은 온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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