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깊은 매력! 산길과 물길 따라, 풍류길 찾아간다
[프레시안 알림]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가 5월, 제91강부터 제6기를 시작합니다. 제6기 주제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걷는 서울 역사문화탐방 둘레길>, 내년 4월까지 예정으로 열두 강의가 진행됩니다. 서울학교는 이로써 제102강을 끝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동안 서울학교를 이끌어오신 최연 교장선생님을 비롯, 이지범, 김순태 교감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뒷바라지에 바빴던 허경옥 스태프도 애 많이 쓰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지난 12년여 변함없는 성원과 참여로 서울학교를 손꼽히는 명문학교로 가꾸어주신 회원 여러분께 큰 인사를 올립니다.
마지막 열두 강의를 준비하는 최연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듣습니다.
서울학교가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으려 합니다.
아쉽지만 제6기를 마지막으로 서울학교를 마무리합니다. 돌이켜보면 무척 긴 여정이었습니다. 2012년 4월에 개강하여 제6기가 끝나는 2024년 4월까지는 12년 1개월의 시간이고 총 102번의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동안 서울학교 일정에 참여하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로지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참여로 긴 여정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함께한 결과물이 <이야기가 있는 서울 길> 두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서울학교를 찾은 발자국들이 여러분의 가슴에 감동으로 아로새겨지길 바랍니다.
제6기 서울학교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서울학교 제6기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걷는 서울 역사문화탐방 둘레길>이라는 주제로 1년간 진행합니다.
서울의 옛 지도를 보면 물줄기는 구불구불 청계천과 한강을 향해 흘러가고 산줄기는 두 물줄기 사이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산줄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산세를 가늠할 수가 없고 물줄기는 모두 복개되어 자동차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서울의 산줄기를 오르내리면서 그곳에 깃들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제6기 서울학교 일정(2023년 5월-2024년 4월)
<2023년>
제91강 인왕산 자락 톺아보기 안평대군 만나러 가는 길
제92강 고구동산에서 서달산까지 충절과 호국의 길
제93강 남태령에서 인덕원까지 정조의 능행 길
제94강 보토현에서 아리랑고개까지 정릉 가는 길
제95강 만리재에서 잠두봉까지 마포나루 가는 길
제96강 매봉산에서 궁산까지 허준과 정선 만나러 가는 길
제97강 응봉에서 낙산까지 흥덕동천 가는 길
제98강 개운산에서 동망봉까지 단종의 애절한 이별 길
<2024년>
제99강 백악에서 탕춘대 능선까지 백사실 계곡 가는 길
제100강 천장산에서 배봉산까지 홍릉 가는 길
제101강 매봉산에서 둔지산까지 독서당 가는 길
제102강 안산에서 용산까지 용산 가는 길
2023년 5월 제91강 인왕산 자락 톺아보기 : 안평대군 만나러 가는 길
5월 서울학교 제91강은 제6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첫 번째 답사로, 한양도성의 우백호이며 봄날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바위와 잘 어울리는 절경이라 한양의 경치 좋은 다섯 곳 중의 하나로 꼽혔던 인왕산이 품고 있는 유적들을 톺아보려 합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 제91강(제6기 제1강)은 2023년 5월 14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홍지동 125-2, 세검정삼거리 <석파랑> 식당 앞에 모입니다(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하차, 3번 출구로 나와 지선버스 탑승, 20여 분 후 상명대앞 정류장에서 하차, 건널목 건너면 한옥 <석파랑> 식당이 보입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석파랑식당앞-석파정별채-탕춘대성-너럭바위(자하문밖조망)-윤웅렬별장-무계정사터-무계원-윤동주언덕-백운동천-청송당유지-겸재생가터-운강대(효자유지)-칠궁(육상궁)-청풍계-정철생가터-선희궁터-이완용집-(점심식사)-인곡정사-자수궁/인경궁터-송석원터-수성동계곡(기린교/비해당터)-세종탄생지-창의궁터-백송-월성위궁터-필운대-사직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서촌의 식당 사정이 단체식사에 어려움 있어 각자 부담으로 자유식 한 다음 다시 모입니다.
인왕산 자락에 즐비하게 숨어 있는 역사적 명소들
인왕산 자락에는 조선 시대의 유서 깊은 유적들이 골짜기마다 즐비하게 숨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두 빈터로 남아있지만, 그때의 모습은 전해지는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들고 골짜기를 찾아다니면서 우리의 인문학적 상상력만 조금 보탠다면 조선 시대의 이름있는 인사들과 그들이 노닐었던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인왕산이 부려놓은 물줄기인 백운동천, 옥류동천, 청풍계, 수성동계곡과 그 골짜기에 꼭꼭 숨어 있는 대원군의 석파정, 윤웅렬 별장, 안평대군의 비해당과 무계정사, 성수침의 청송당, 겸재가 살았던 유란동과 인곡정사, 조선 후기 노론의 중심이 된 김상용과 김상헌의 집, 정철과 세종의 탄생지, 위항문학의 최고봉 옥계시사의 송석원, 영조의 잠저 창의궁, 이항복의 집 필운대, 그리고 국가시설인 칠궁과 사직단을 찾아갑니다.
인왕산은 사림(士林)의 문화가 터를 잡기 이전부터 한양의 불교 성지였는데,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인왕사를 비롯하여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 세조 때 지은 복세암, 궁중의 내불당 등 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사찰이 가장 많이 있었으며 특히 인왕(仁王)은 ‘금강 역사상’으로 사찰의 입구에 있는 수호신이었음을 미루어 볼 때, 인왕산은 한양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석 숭배 혹은 바위 정령을 믿는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성향으로 보아, 인왕산의 형세는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듯이, 높이 솟은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고, 그 주변과 계곡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바위 형상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며 그 모양새에 따라 선바위, 말바위, 매바위, 기차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선바위[墠岩]는 ‘제사 지내는 터’라는 뜻으로,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이은 조선의 건국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로 두 개의 큰 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 또는 이성계 부부라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달리 두 바위 중 오른쪽 바위가 고깔을 쓴 장삼 차림의 승려를 닮았다고 하여 ‘선바위[禪岩]’로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만 이는 바위가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왕산은 한양의 내사산 중 우백호에 해당하며 달리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임금이 계신 궁궐의 오른쪽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右弼雲龍)”는 의미로 필운산이라 하였고 이항복의 집이 있었던 필운대라는 지명도 이로부터 나왔습니다.
인왕산이 동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은 수려하고 넓어서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사직단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맑은 계곡에 기암괴석과 송림이 어우러져 조선 사대부들의 살림터와 정자가 많이 들어섰으나 북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은 수려하고 그윽하기는 하나 넓지 못하여 왕족과 귀족의 별장이 몇 채 있었을 뿐입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석파정(石破亭)의 원래 이름은 삼계정(三溪亭)으로, 삼각산의 문수봉과 보현봉 그리고 백악(북악산) 사이로 흘러내리는 세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홍제천이 되어 난지도(현재의 하늘공원)에서 불광천과 만나 한강으로 합류하는데, 세 계곡이 만나는 곳에 지은 별장이라 삼계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삼계정은 철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잠시 머물기로 하고는 그냥 눌러앉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정자의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석파라 하였습니다.
석파정의 본채는 부암동터널 입구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고, 별채는 서예가 손재형이 자신의 한옥을 지을 때 사들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는데 ‘대원군 별장’으로 명명되어 본채와 무관하게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별도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새로운 건축양식을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호젓한 소나무 길인 서쪽 능선
인왕산의 서쪽 능선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대체로 창의문에서 바로 인왕산에 오르기 때문에 이곳으로 오르는 이들이 드물어 능선에 올라 호젓한 소나무 길을 걸어가면 도시에서 켜켜이 쌓인 홍진이 말끔히 씻어지는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능선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멀리 산줄기를 조망해 보면 서남쪽으로 보현봉, 문수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수리봉으로 뻗쳐 있고 동남쪽으로는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지나 구준봉을 거쳐 백악에 이르는 능선이 뻗어 있습니다.
이 두 능선 사이의 계곡을 아름다운 바위와 맑은 물로 유명한 한양 5경의 하나인 ‘세검정 계곡’이라 하고 달리 경치 좋은 곳으로 일컫는 ‘자하문 밖’이라고도 하는데, 자하문은 창의문의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 밖’이라 함은 지금의 세검정, 평창동, 부암동, 신영동, 구기동 일대를 말합니다.
윤웅렬 별장은 대한제국의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반계 윤웅렬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猩紅熱)을 피해 지내기 위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자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일종의 별장 유적으로 1905년 6월에 착수해 1906년 3월 이전에 완공되었는데 2층의 서양식 벽돌 조로 지었습니다.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했습니다. 이 집은 경사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향하여 자리 잡았는데, 넓은 정원을 지나면 전면 높은 석축 위에 행랑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있으며, 뒤편에 있는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별장 건물 중에 가장 먼저 지어진 것입니다.
안평대군 별서인 무계정사
무계정사(武溪精舍)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이 머물던 별서입니다. 정사를 짓고 후원에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었는데 이 후원이 현재 부암동 321-2번지 무계동 언덕 일대로 경치가 뛰어납니다.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꾸었고, 꿈속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비슷한 현실의 장소에 별서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꿈을 꾼 내용을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안견이 그린 그림이 〈몽유도원도〉로, 제작연도가 1447년(세종 29)이라서 만약 두 일화 속 도원의 꿈이 같은 것이라면, 안평대군이 무계동에 정사와 후원을 조성한 시기는 <몽유도원도>를 그린 1447년 즈음으로 보입니다.
현진건 집터는 연못, 연못 후면이 무계정사, 무계동 언덕 일대가 복숭아 천 그루를 심었던 후원으로 보입니다. 비록 <몽유도원도>는 일본에 있지만, 무계정사 터와 아름다운 후원 일대 그리고 안평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는 무계동 언덕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451년(문종 1년)에 안평대군의 부탁을 받고 이개는 〈무계정사기〉를 지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 무계정사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북문 숙정문을 벗어나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2리 정도 가다가, 잿마루로 올라가 서쪽으로 조금 틀어서 동부(洞府)를 굽어보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탁 트여서 사람이 사는 곳인가 할 정도로 다르게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에 비해당 이용의 정사가 위치한다.
이 골짜기는 백악산 서북쪽 기슭에 있고, 안쪽은 완만하고 외부는 조밀하여 구역 하나를 은은하게 형성하고 있다. 동서 거리는 2,300보 정도이고 남북은 그 절반쯤이다. 그 가운데로 시냇물이 흘러서 돌에 부딪쳐서 포말을 형성하고 물소리를 세차게 내면서 아래로 쏟아지다가 계곡 입구에 이르러 높이 매달려 12발 정도 길이의 폭포가 되는데, 소위 '무계(武溪)'라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연못에는 연꽃을 심었고, 채소밭에는 오이를 심었다. 또한 복숭아나무 수백 주와 대나무 수백 떨기가 잘 배열된 채 주변을 에워쌌다. 정사가 동네 어귀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을 어귀는 서남쪽에 있으므로, 채연(采椽, 누추한 집)과 시비(柴扉,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사립문)가 산을 벤 채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올라가서 한번 돌아보니 풀과 나무는 무성하고 연기와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 올라있어서 그윽한 듯 비어있는 듯한 것이 꼭 도원동의 기이한 운치 같았다.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 그 이유를 찾아보려 했더니만, 다래 넝쿨이 얽혀있고 바람소리, 물소리가 요란하며, 새들은 숲에서 놀라고 다람쥐는 구멍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아득해서 찾을 수 없었다.
드디어 북쪽으로 조그만 능선에 있는 비탈길을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겹겹으로 이어진 높고 낮은 봉우리가 원근을 에워싼 채 인사하는 듯하고 어찌 보면 또 합장하는 듯했으며, 또한 규(圭, 서옥)를 받든 듯도 하고, 구슬이 널브러져 있는 듯도 했다. 여러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은 큰 냇물에 합류했는데 치닫는 물결과 반석을 두고 몇 리를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다시 정사로 돌아와 쉬니, 정신은 맑아지고 뼈까지 상쾌하여 그대로 머물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안평대군은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무계정사에 책 만권을 들여놓았으며 용산 강변에는 담담정을 지어 많은 책을 두고 독서도 하고 시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년)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에 엮여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사사 당했고, 주인 잃은 무계정사는 폐허로 변했으며 담담정은 신숙주가 물려받았습니다.
백운동천(白雲洞天)은 조선 전기 4대가로 칭송받던 김수온, 이승소, 강희맹, 김종직 등이 백운동 경치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였고 겸재 정선은 그림을 남겼으며 <용재총화>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등에서도 한양도성 내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다섯 곳인 삼청동천, 옥류동천, 쌍계동천, 백운동천, 청학동천 중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옛 풍경은 다 사라지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만 남아 있습니다.
백운장은 김가진이 백운동천에 지은 집으로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김가진은 1903년(고종 40) 비원 중수를 위한 비원 감독으로 임명됐는데 비원을 중수하고 남은 재목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백운장을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백운장 터와 그가 쓴 ‘光武 7年 癸卯 仲秋 東農’이라는 관지가 작게 새겨진 ‘白雲洞天’이란 바위 글씨가 남아있는데 “1903년 계묘년 가을 동농이 썼다”라는 뜻입니다.
김가진은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측근 관료로 호는 동농이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11세손입니다. 그는 총명했지만 서자 출신이어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32세 되던 1877년(고종 14)에야 비로소 서얼들의 관직이었던 정9품 규장각 검서관에 올랐습니다. 이후 하위직을 전전하다가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면서 고위직 관료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마침내 대한제국 법무대신에 이릅니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로서 상해에서 병사합니다.
청송당(聽松堂)은 성수침이 34세 나던 해인 1526년(중종 21년) 병술년 봄에 지금의 경기상고 안에 있었던 자신의 집에 지은 공부하는 서실입니다. 성수침은 기묘사화 때 스승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선비가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백악 기슭의 집 뒤에 지은 서실인 청송당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성수침의 문집인 <청송집>에는 청송당 이름을 눌재 박상이 1526년(중종 21)에 붙여준 것으로 나옵니다. 이곳 일대의 행정 동명이 창성동인데 이는 성수침의 본향인 창녕의 ‘창’과 성수침의 ‘성’을 따서 창성동이라 하였습니다.
우계 성혼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이 백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 부친 성세순 때부터입니다. 이것은 성혼이 지은 <성세순 행장> 가운데 “백악 아래 집을 정하였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하였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 줄 몰랐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수침이 죽은 후 청송당이 폐허로 변하자 성수침을 흠모하는 사람들, 특히 후학들은 이를 중건하고자 하였으나 성수침과 절친하였던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중건을 위해 모였던 사람들을 헐뜯는 상소를 올리자 중건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청송당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 후 청송당은 50여 년 동안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1668년(현종 9) 외손 윤순거와 윤선거 등이 뜻을 합하여 중건하였는데 이때 송시열이 기문을 지었고, 송시열과 윤순거, 윤선거, 남구만 등은 이 일을 기념하는 시회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성수침이 절의를 지키며 제자를 길러낸 청송당은 이이, 성혼의 학풍을 계승한 후학들에게는 대대로 하나의 성지로서 인식되었습니다.
성수침은 본관은 창녕, 자는 중옥, 호는 청송으로 아우 수종과 함께 조광조의 문인이었으며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1541년 천거로써 후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에 은거하였습니다. 1552년(명종 7) 내자시 주부, 예산 현감, 토산 현감, 적성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습니다. 1564년 사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과 미두와 역부를 지급해주고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였습니다.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과 물계의 세덕사에 제향되었습니다. 시호는 문정이며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곳
겸재 정선은 1676년(숙종 2)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으로 추정됩니다. 인곡정사는 정선이 52세부터 살기 시작하여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예전에 자수궁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정선은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인 후원을 했는데 정선이 안동 김씨 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를 여러 번 그린 것은 경제적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선은 안동 김씨의 후원과 더불어 영조의 총애도 받았습니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를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고 합니다. 정선의 나이 58세(1733년)에 영조는 정선을 청하 현감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관동팔경 등 동해안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담았고, 경상도 명승지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영남 첩>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정선은 청하 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그만두고 상경했습니다.
영조는 정선이 65세 되던 해(1740년)에 다시 양천 현령에 임명하였습니다. 양천 현령에 임명된 것은 ‘서울 사람’인 정선이 진경산수를 마음껏 그리면서 재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곳에서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 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것이 <경교명승첩>입니다.
정선은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붓끝에서 조선의 산하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나 <금강산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습니다.
운강대(雲江臺)는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운강 조원의 유지입니다. 조원은 스승인 남명 조식으로부터 아름다운 선비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습니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1575년 정언이 되어 이 해에 당쟁이 시작되자 그 폐해를 상소, 당파의 수뇌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듬해 이조 좌랑이 되고, 1583년 삼척 부사로 나갔다가 1593년 승지에 이르렀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 자손의 교육도 단엄하였습니다. 저서로는 <독서강의>가 있으며, 유고로는 <가림세고>가 있습니다.
그의 소실이었던 이옥봉은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명류였으나 소실로 들어가면서 “시를 쓰지 않겠다”라고 한 약속을 어겨 쫓겨나게 되자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몽혼>이라는 시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 되는 명시입니다.
이옥봉은 조원에게 쫓겨난 후 혼자 살다가 온몸에 시를 쓴 종이를 여러 겹 감은 채 중국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종이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란 내용과 시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40여 년이 지난 후 승지가 된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의 원로대신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몽혼(夢魂)
-이옥봉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요즘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달빛이 깁창을 비추니 저는 한에 사무치나이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만일 꿈속의 혼이 다니며 자취를 남겼더라면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님의 집 앞 돌길은 반이 모래가 되었을 텐데.
또한 조원의 장남인 조희정과 차남인 조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몸으로 막다가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둘은 효자로 표창되어 ‘쌍효자’ 집이 되었고 효자동이란 지명도 이들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맑은 바람 계곡’ 청풍계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산 동쪽 청운동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으로 원래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렸는데 선원 김상용이 이곳에 집터를 물려받으면서 선조가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라는 현판을 내리면서 이후 ‘푸른 단풍나무 계곡’이 ‘맑은 바람 계곡’으로 바뀌었습니다.
‘맑은 바람’은 ‘좋은 기풍’이란 뜻으로도 널리 쓰입니다. 특히 옛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은 백이와 숙제를 ‘백세청풍’ 즉, ‘영원한 맑은 바람’이라고 기리면서 ‘청풍’은 충절이란 뜻으로도 쓰였으며 선조도 이 뜻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보입니다.
17세기 들어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이름을 드날리면서 백세청풍 뜻은 조금 달라집니다. 병자호란 때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형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아우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으며 훗날 청나라의 파병 요구를 반대해 심양에 끌려갔다가 6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 때문에 이 형제는 조선 후기 대의명분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이 형제의 결사항전 신화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든 이가 조선 후기 서인 노론의 200년 집권을 열어젖힌 우암 송시열입니다. 김상용의 늠연당 뒤 바위엔 주희가 쓴 ‘백세청풍’이, 늠연당 앞 바위엔 송시열이 쓴 ‘대명일월’이 새겨졌는데 ‘명나라는 해와 달과 같이 영원하다’라는 뜻입니다.
송시열 이후 서인 노론의 200년 집권기에 백세청풍의 의미는 또 한번 바뀌었는데 바로 서인과 노론, 그리고 장동 김씨의 영원한 집권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결사항전 신화 이후 그들의 집안에선 무려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한 집안에서 낸 가장 많은 정승, 판서입니다. 이 형제를 드높인 송시열은 공자, 맹자, 주자에 이어 ‘송자’가 됐습니다. 200년 서인 노론 집권 기간에 60년은 장동 김씨 한 집안이 세도정치를 하였습니다.
청풍계에 들어선 김상용의 거처이자 별서에는 늠연당, 태고정, 청풍각, 와유암 등을 짓고 주변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자를 각각 송시열과 주자의 글씨로 새겼습니다. 지금은 계곡과 모든 건물은 사라져 버리고 ‘백세청풍’ 글씨가 새겨진 바위만 담벼락 아래 처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선비화가 권신응이 남긴 그림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늠연당은 백세청풍 바위 바로 아래 있으며 ‘선원 영당’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습니다. 선원은 김상용의 호이고, 영당은 ‘영정를 모신 사당’으로 다시 말해 이 건물엔 김상용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바로 그 초상화인 듯합니다. 선원 영당의 마당쯤에 ‘늠연당’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데 이것은 선원 영당의 이름으로 옛 문헌엔 ‘늠연사’라고도 쓰여 있습니다. ‘늠연’이란 위엄이 있고 당당하다는 뜻으로 병자호란 때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 갔다가 청군이 밀려오자 자결한 김상용의 꿋꿋한 정신을 기린 표현입니다.
태고정은 늠연당의 아래쪽 시냇가에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로, 청풍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소박하지만 집 전체의 중심 공간으로 김상용 집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김상용 집은 조선 후기 서인과 노론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 집의 중심 공간이 태고정이라서 이곳에는 서인 노론 계열의 대신과 명사들만 방문할 수 있었으며 1790년(정조 14) 정조는 육상궁과 선희궁 등을 참배한 다음 김상용의 집이 있는 청풍계에 들러 태고정에서 잠시 쉬었는데 이때 정조는 김상용의 후손을 만나 벼슬을 내리고 집도 수리해 주었습니다.
태고정 오른쪽으로 3개의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맨 위로부터 ‘조심지’는 ‘마음을 비추는 연못’이고, ‘함벽지’는 ‘옥을 적시는 연못’으로, 인재를 가르치는 연못이라는 뜻이며 ‘척금지’는 ‘옷고름을 씻는 연못’으로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세 연못의 오른쪽에 청풍각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으며 세 연못과 청풍각 아래에 3칸으로 이뤄진 솟을대문이 서 있고 그 아래쪽에 김상용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입니다.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신주를 봉안한 묘사로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으며 원래 영빈이씨의 시호를 따서 의열묘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1870년(고종 7)에 위패를 육상궁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렸는데 그렇게 하게 된 연유는 영친왕이 태중에 있을 때 순헌엄귀비의 꿈에 영빈이씨가 나타나서 폐한 사당을 다시 지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답니다. 엄귀비는 영친왕을 낳고 나서 꿈 이야기를 고종에게 고하여 본래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서 다시 신주를 모셨으나 1908년에 신주를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 모셨다고 합니다.
칠궁은 후궁 태생의 임금이 그의 어머니 신위를 모신 곳
칠궁은 왕실의 사묘로 조선 시대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육상궁은 1725년(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으로 개칭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습니다.
1908년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연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경우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선희궁,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의 대빈궁,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의 저경궁 등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엄씨의 덕안궁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파주 교하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때마침 풍수지리가 성지와 시문용 등이 ‘인왕산 왕기설’을 강력히 주장하자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16년(광해군 8)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승군을 징발하여 인경궁, 자수궁, 경덕궁(경희궁) 등 세 궁궐을 지었습니다.
인경궁은 사직동 부근에, 자수궁은 한양 오학의 하나였던 북학의 자리에,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사저에 지었으나 인조반정 뒤, 경덕궁만 남겨두고 인경궁과 자수궁을 폐지하였습니다. 인경궁은 1648년(인조 26)에 청국의 요구로 홍제원에 역참을 만들 때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하여 태평관의 건물까지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였습니다.
자수궁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집으로 문종 때 세종 후궁들의 거처로 삼은 이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살았으며 자수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자수원이라 이름을 고친 뒤 이원[僧房]이 되었는데 후궁 중에서 아들이 없는 이는 이원에 들어와 있게 하였으므로 한때 5,000여 명의 여승이 살았습니다. 1661년(현종 2)에 여승의 폐해가 심하여 부제학 유계의 상계로 폐지되면서 어린이들은 환속시키고 늙은이들은 성 밖으로 옮겼으며, 1663년 자수원의 목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을 세우고, 또 일량재와 벽입재를 세웠습니다.
인왕산 옥류동천이 흘러내리는 송석원의 풍광
송석원(松石園)은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옥류동천이 이곳을 관통하였으며, 계곡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많은 양반과 중인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위항문학운동이 일었는데, 옥류동 계곡에 천수경이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그를 중심으로 열린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천수경 사후 송석원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 윤덕영이 송석원을 차지하였습니다. 윤덕영은 일제 강점기에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건물인 양관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습니다. 양관은 한국전쟁 전후에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에 불탔고, 1973년에 철거되었습니다.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시사가 모이던 뒤편 바위에 가로로 ‘송석원(松石園)’ 각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소봉래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달았습니다. 이 각자의 위치는 현재 불분명하며 김정희가 각자를 새겼을 때는 이미 송석원시사가 몰락하던 때로 1818년에 천수경이 죽은 뒤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후 안동 김씨 김수근이 송석원의 옛터를 사 청휘각을 중건하였으며, 이에 따라 청휘각 일대가 송석원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860년대에 들어 안동 김씨가 힘을 잃고 명성황후를 배경으로 여흥 민씨가 세도정치의 중심점에 서면서, 1870년대에는 민태호와 민규호에게 송석원이 넘겨졌는데, 안동 김씨인 김학진은 후일 이를 민규호가 가재 우물의 물을 마시고 싶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송석원을 넘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민영익, 민영소, 민영린이 송석원을 차례로 소유하였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1904년 순명비 민씨의 사망을 계기로 매각되면서, 고제익이 사들였다가 다시 양성환이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윤덕영이 일본이 준 은사금 46만 원을 들여 1910년 동지 즈음에 송석원 일대를 매입한 후 옥인동에서 땅을 끊임없이 사들여 1917년 기준으로 옥인동 전체 토지 면적의 49.5%(16,628평)를, 1927년 기준으로 53.54%(19,467.8평)를 소유하였습니다.
윤덕영은 민영찬이 프랑스에서 본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13년에 자신이 소유한 옥인동 대지에 저택 건설을 착수하였으나 해외의 비싼 자재를 들여 짓게 하느라 많은 건축업자가 파산하면서 1935년에 비로소 완공되었으나, 바로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에 임대되었으며, 윤덕영 사후 윤강로가 1945년에 건물과 부지 일체를 미쓰이 광산주식회사로 매각하였습니다. 양관은 해방 직후 덕수병원으로 쓰였고, 한국 전쟁 중에는 미8군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54년 6월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 본부가 입주하여 사용하다가 1966년 4월 5일에 보수공사 도중 화재로 전소되었고 1973년 6월에 철거되었습니다.
서용택 가옥은 윤덕영의 소실 이성녀가 살던 집으로 ‘소실댁’이라 불렸습니다. 1919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한때 순정효황후의 집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국유였던 소실댁은 1955년에 서용택이 일부 사들였고, 1990년에 그가 가진 지분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 팔렸습니다. 소실댁은 한때 최대 13가구가 나누어 살면서 부분적으로 증축되고 변형되어 퇴락하였고, 2010년 기준으로는 일곱 가구가 나눠 거주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소실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일본식의 장식이 있습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이 집을 본따 지은 한옥이 있습니다.
박노수미술관은 윤덕영의 맞사위 김호현이 소유하였는데 한옥과 프랑스식 건축을 절충하여 박길룡이 설계하였으며 1973년부터 박노수가 사들여 살다가 2013년에 박노수미술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1940년대에는 건물 뒤쪽에 양관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었습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천수경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중인계층이 인왕산 아래 옥류동의 송석원에서 1786년(정조 10)에 결성하여 1818년(순조 18)에 해산한 문학모임으로 달리 옥계시사라고도 부르며 송석원은 천수경의 별장 이름입니다.
그 주요 인물은 맹주인 천수경을 비롯하여 장혼, 김낙서, 왕태, 조수삼, 차좌일, 박윤묵, 최북 등으로, 이들은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라는 편액을 걸고 그들과 같은 처지의 시인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 소요자적하였는데, 후일에 흥선대원군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들의 활동 중 백전(白戰)은 전국 규모의 시회로 1년에 두 차례씩 개최되었는데, 남북 두 패로 나누어 서로 다른 운자를 사용함으로써 공정을 꾀했고 1797년에 <풍요속선>을 간행하여 <소대풍요> 이후 60년 만에 위항인들이 그들의 시선집을 간행하는 전통을 수립하였으며 구성원들의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송석원시사와 위항문학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대부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조선 사회에 서인과 중인을 중심으로 하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이 등장하게 된 것은 숙종 때로, 신분이나 경제력에서 사대부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던 위항인들이 자기 권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문학 모임인 시사였고, 대표적 그룹이 송석원시사였습니다.
이완용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곳은 태화관 터, 명동성당 부근 등과 1913년 이후부터 죽기 전까지 살았던 ‘옥인동 19번지’ 일대로서 약 3,700여 평의 꽤 넓은 땅을 소유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다른 친일파와 마찬가지로 그 재산은 적산으로 몰수하여 일부는 민간인에게 불하하고 많은 부분이 국유지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파출소, 종로구보건소, 한전출장소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악명 높았던 ‘옥인동 대공분실’이 그 국유지에 줄지어 들어서 있고, 이완용이 살았던 집은 지금도 유럽풍의 양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수성동계곡에 지어준 집
비해당(匪懈堂)은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물소리가 들리는 수성동계곡에 60칸의 방과 10칸의 누각이 있는 집을 지어주고 당호를 ‘비해당’이라 내렸습니다. 안평대군은 이곳에서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서회를 자주 열어 <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비해당 48영>의 시를 남겼습니다. 비해당은 안평대군 사사 후 효령대군에게 주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으며 이후 비해당, 무계정사, 담담정 등 안평대군의 거처와 관련 있는 모든 기록물 또한 사라졌습니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은 안평대군의 주도로 당대 19인의 문인들과 함께 남송 영종의 팔경시를 베껴 쓰고, <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하여 판각한 다음 고려의 이인로와 진화의 팔경시를 이서(移書)한 두루마리 권축장(卷軸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남송 영종의 <팔경시>와 <소상팔경도>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상팔경도>는 신죽주의 <화기>에 ‘안견팔경도각일’이라 기록되어 있어 안견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여한 19인의 문사는 서문을 쓴 이영서, 정인지. 안 지, 안숭선,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최 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출신 관료 12명과 문사 김종서, 승려 만우, 그리고 세종의 문치를 뒷받침했던 문인 관료인 강석덕, 하 연, 조서강, 김 맹, 윤계동 입니다. 시문은 이들의 친필이며 오언배율, 오언고시, 오언절구, 육언절구, 칠언고시, 칠언율시, 칠언절구 등의 형식으로 시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단종으로부터 세조에 이르는 사이에 안평대군을 위시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이 피살되고 단종 복위운동으로 사육신 등 많은 명사가 희생되었으며, 이어서 집현전도 폐지되면서 당시 사림들이 남긴 진적(眞蹟)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비해당 48영(匪懈堂 48詠)>은 안평대군이 집현전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남긴 시문으로, 비해당의 단장을 마친 안평대군이 1442년 비해당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더하여 기화요초와 애완동물을 도입한 후 비해당의 아름다운 경물 48가지를 선정하여 스스로 발제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차운시로 답하게 하여 남긴 시입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시는 성삼문, 신숙주. 김수온, 최항, 서거정 다섯 명의 시이고 이 개, 이현로, 이승윤, 임원준의 시는 없어졌습니다.
屋角梨花(옥각이화) 집 모퉁이 배나무 꽃
-성삼문
春雨三杯後(춘우삼배후) 비에 석 잔 술 마신 뒤에
微酡倚睡鄕(미타의수향) 작은 취기에 꿈나라에 맡기네.
覺來開兩眼(각래개량안) 깨달음에 두 눈을 떠보니
氷雪映斜陽(빙설영사양) 얼음 눈이 기우는 해에 비치네.
창의궁(彰義宮)은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이곳은 원래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의 부마 인평위 정제현이 살던 집이었으나 숙종이 이를 훗날 임금에 오르는 연잉군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영조의 세자인 효장세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결혼하자 이들을 위해 창의궁 옆에 집을 지어주었는데 부마 월성위 김한신의 집이라고 ‘월성위궁’이라 하였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
필운대(弼雲臺)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 지금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세 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弼雲臺'라는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집을 지을 때 감독관으로 보이는 동추 박효관 외 9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며 오른쪽 위에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월성 이유원이 쓴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고,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사 지내던 곳입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임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해서 대대로 세습이 되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씨가 마르지 않게 대를 잘 잇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비옥한 토지와 튼실한 씨앗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중심으로 임금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宗廟]을 왼쪽에 두고 조상의 음덕으로 대를 잘 이을 수 있도록 기원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社稷壇]을 두어 임금이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조오례서례>에 따라 사직단의 규모를 살펴보면 사직단의 사단과 직단은 각각 사방이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이며 사방으로는 3층의 계단이 있습니다. 사직단의 단 위에는 방향에 따라 정중앙에는 황색, 동쪽에는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등 오방오색의 흙을 깔았습니다. 또한 사단의 남쪽 계단 위에 길이가 2척 5촌인 석주가 있으며, 사직단 둘레에 유(壝)라고 하는 울타리를 둘렀고 여기에 사방으로 홍살문을 두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5월)를 확인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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