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사실 왜곡·호도한 책임은 누가 지나?

박병진 2023. 4. 2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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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공개 정보 상당수 위조됐다 주장
美의 전방위 도·감청, 사실로 드러나
국민 자존심 상처, 그냥 넘겨선 곤란
‘파이브 아이즈’ 가입은 그다음에

2012년 6월 이명박 정부 때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국무회의에서 즉석 안건으로 상정해 비공개 처리했다. 세계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국내 반발 여론에 밀려 지소미아는 서명식 직전에 체결이 연기됐다. 밀실 처리를 주도한 책임을 지고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수석급)이 물러났다. 사퇴하기 전까지 그는 대북 강경 정책을 주도한 대통령의 ‘실세 참모’였다.

10년이 흘렀다. 그가 국가안보실 1차장이다. 그때처럼 실세다. 공교롭게도 또 논란에 휩싸였다. 기밀 문서 유출로 드러난 미국의 한국 등 동맹국에 대한 도·감청 파문이다. 문제가 된 기밀 문서에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포탄을 수출해달라는 미국 요청을 받고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상세히 기술돼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도청하지 않으면 알아내기 어려운 내용이다.
박병진 논설위원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미국을 편드는 데 급급했다. “사건을 과장, 왜곡해 동맹 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며 실드(shield)까지 쳤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 일정 협의차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을 방문한 김 차장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는 워싱턴 인근 덜레스 공항에서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진 정황이 없다”면서 “이 문제에는 제3자가 개입됐다”고 했다. 전날 출국 전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서도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전달)할 게 없다”며 “왜냐하면 누군가가 위조한 것이니까”라고 답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다. 아쉽게도 그는 덜레스 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조작 결론의 근거는 묻지 말라거나 질문 주제의 변경을 요구했다. “같은 주제로 (계속) 물어보시려면 전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됐습니까”라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보는 국민들이 모를 리 있겠나. 그가 알고도 그랬다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

그의 설명은 미국과의 엇박자로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지난 10일(현지시간)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관련한 브리핑에서 “우리는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거나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한 것과 크게 상반된 탓이다. 도청을 저지른 국가가 미안하다는데 정작 도청을 당한 나라에서 괜찮다며 오히려 두둔하는 꼴이다. 동맹도 중요하지만 이런 사대는 조선 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아닌가.

선을 넘었지만 김 차장 말대로 이번 도청 파문이 ‘위조’로 일단락됐다면 동맹인 미국의 일이니 한 번 눈감아 줄 수도 있었을 게다. 바람은 수포였다. 지난 1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방위군(공군)에 소속된 21세의 잭 테세이라 일병이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미국의 전방위 도·감청과 허술한 보안 관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러니 대통령실과 김 차장의 해명은 군색해질 수밖에.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나라 꼴이 이상해졌다”거나 “이런 코미디도 없다”는 조소(嘲笑)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꽤나 나돌았다. 가뜩이나 김 전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국빈 방문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 올 상반기 최대 외교 이슈를 앞두고 갑자기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마당이다. 지난 3월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파장은 여전하다. 외교 안보를 둘러싼 난맥상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다.

미국의 도·감청 파문은 자국 이익 앞에 동맹도 가리지 않는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새삼 놀라워할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물쩍 넘어가선 곤란하다. 사과나 재발 방지, 그것도 안 된다면 서운하다거나 불편하다는 식의 우회적인 입장 표명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는 게 그나마 일말의 국민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니까. 하지만 이를 외면하고 누군가 사실을 왜곡, 호도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게 마땅하다. 미국 주도 첩보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 가입 추진은 그다음 일이다.

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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