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사람] 바른 역사의 첫 걸음…4·3 진상규명동지회

신익환 2023. 4. 19. 19:3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KBS 제주] [앵커]

오늘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끈 4.19 혁명이 일어난 지 6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최근 진실화해위원회가 1960년 4.19 혁명 직후 결성된 '4·3 진상규명동지회'에 대한 군부 정권의 탄압이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라는 결정을 내렸는데요.

당시 '4·3 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했던 이문교 전 4·3 평화재단 이사장을 신익환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안녕하세요.

최초의 진상규명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4.19 이후에) 자유당 정권에서 묻혀져 있던 여러 가지 불법 사건들이 많이 폭로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 그 가운데도 특히 양민 학살 피해자들이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외침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내용이 중앙 일간지에 많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4.19 운동을 주도하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이 사건들보다 제주 4·3 사건이 더 큰 규모가 아닌가. 그래서 이 피해를 조사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한거죠. 가장 열렬하게 참여하는 친구들을 모으는데, 처음에는 20여 명이 함께 진상 규명 활동을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빠지고 일곱 명만 굳은 결의를 한거죠."]

그렇다면 당시 동지회가 어떤 방식으로 진상 조사 활동을 하셨을까요?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우리들이 굳은 결의를 하면서 시작한 것은 우선 도민들의 협조를 받자. 그래서 호소문을 작성해서 시내에 배포하고, 1960년 5월 26일 자 제주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어요. 그렇게 하고 27일부터 현장 조사를 실시했죠. 제주도 일주도로의 전체 길이가 181km인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도보로 걸으면서 마을마다 들려서 조사하고 하다 보니까 200km 넘는 거리를 걸었죠. 그게 5박 7일 동안 마을마다 가서 제일 먼저 선택한 사람들은 당시 이장들을 났습니다. 그런데 이장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농사철이 되니까 전부 집에 있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전직 이장, 또 전직 이장이 없을 때는 수소문해서 그 마을에서 가장 원로 되는 어른들, 그런 분들 몇 분씩 만나면서 그 당시의 피해들을 청취했죠."]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우리가 현장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일단은 군경에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가지고 구금되거나 또 마을 현장에서 총살당한 사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서북청년단들이 내려와 서북청년단 멤버들이 군 부대 경찰 보조부대로 편성이 됐거든요. 이 사람들이 일선 마을에 내려가서 행패가 굉장히 심했어요. 이 사람들 다니면서 무슨 행패를 부렸느냐면은 이승만 대통령 사진·태극기 가지고 다니면서 사라고 해서 구매하지 않으면. 농촌은 돈이 없거든요. 그러면 구타를 하거나 그리고 여성들을 무자비로 성폭행을 가하거나 그런 증언들을 많이 우리가 들었어요."]

그런데 5.16 직후 군부가 동지회 회원들을 예비검속하고 구금, 가혹 행위를 했습니다.

당시에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내가 (1961년) 5월 18일 검거돼 들어갔는데, 경찰국 수사과 대공계라고 하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대공계는 간첩수사 하는데죠. 대공계에서 우리 사건을 맡아서 수사를 하는데, 조사를 받을 때는 방첩대 수사관이 함께 꼭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루 종일 형사와 진술, 답변을 하는데도 한 페이지도 진척이 안 돼요. 어떤 때는, 논쟁을 하다 보면은. 그래서 이 양반들이 화가 오르면은 형사는 가만히 있었는데, 방첩대 수사관이 와서 구타하는 거죠. 그래서 그때는 조사받을 때는 많은 구타를 당했는데, 그에 대한 고통 그 자체보다도 분노 같은 걸 많이 느꼈죠."]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한 마디로 감동이죠. 뭐. 4·3이 가는 길을 밝게 해주는 하나의 요인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것이 국가 기록으로 정리됨으로써 4·3 진상 규명 운동이 지금까지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정리하거든요. 1960년에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동지회가 활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4·3의 정리를 하는데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기록으로 정리되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무슨 개인 기록이 아니고 국가 기록으로 정리되니까 제주 4·3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도 되는 거고 그럴 겁니다."]

진화위가 이번 결정을 내리면서 후속 조치, 국가가 사과하고 이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를 해야 된다.

어떤 조치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세요?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국회에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이 지금 발의돼 있습니다. 그 안에 5.16 이후 불법 구금에 의해서 피해를 받은 사람에 대한 구제조치를 하라고 하는, 일괄적으로 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법안이 언제 국회에서 통과될지 모르잖아요. 개별적으로 보상 청구를 하는데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뭐냐 면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면 되는데 대법원까지 간다면은 3~4년은 걸리거든요. 그리고 그에 따른 부대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그런 약점들이 있는데, 어떻든지 법적으로는 보장돼 있고, 회복 조치는 과거 대법원 판례로 3년으로 돼 있습니다. 피해 사실에 대한 결정 내용을 안 때로부터 3년 동안에 처리를 해야 돼요, 본인이.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보면은 국회에서 그 법 빨리 통과되면은 자동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갖습니다."]

[이문교/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 "4·3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지만 그 진실을 추구하는 바른길은 계속 갈 겁니다. 근래에 4·3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폄하하거나, 여러 가지 개인적 의견들을 진술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아요. 4·3은 대도를 향해서 꾸준히 가고 있고, 바른 역사를 정리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익환 기자 (sih@kbs.co.kr)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