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 한 마디’ 장벽 찾아다니며…동네 계단 ‘뿌수고’ 다니는 사람들

전지현 기자 2023. 4. 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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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 ‘계단뿌셔클럽’
교통약자 위한 지도 제작 위해
이동권 관점에서 길 걸으면서
계단·엘리베이터 유무 등 조사
계단뿌셔클럽 활동가들이 지난 16일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정지운 파트너로부터 동네의 계단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 설명을 듣고 있다. 최유진 PD

지난 16일 오후 2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도림천변. ‘계단정복지도’ 깃발을 든 정지운 파트너 주변에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 8명이 모였다. 주최자 말고는 초면인 이들은 서로에게 “혹시 계단뿌셔클럽···?”이라고 물으며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계단뿌셔클럽은 도시의 계단 정보를 모아 장애인 등 교통약자에게 편리한 지도를 만들자는 취지로 박수빈(34)·이대호(33) 공동대표가 2021년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이들은 건물과 점포를 돌며 계단·엘리베이터 유무, 휠체어 접근성을 조사해 자체 개발한 ‘계단정복지도’ 애플리케이션에 기록해왔다.

방대한 작업은 시민들의 참여로 가능했다. 이들은 분기마다 온라인으로 ‘함께 계단을 정복할’ 참가자를 모집하는데, 지난해 말까지 450여명의 참가자가 1만여개 점포를 조사했다. 이날 관악지부 모임에 참여한 8명도 인스타그램, 마을 커뮤니티, 지인의 소개 등을 통해 계단뿌셔클럽을 알게 돼 ‘계단을 부수러(조사하러)’ 온 이들이었다.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16일 계단뿌셔클럽 활동가들이 동네의 계단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최유진 PD

경기 일산에 거주하는 장훈씨(37)는 “걷는 것을 원래 좋아하는데 의미 있는 일과 접목할 수 있다는 게 맘에 들어 신청했다”고 말했다. 모임 장소 인근에 사는 김현희씨(42)는 “지나쳐가던 길을 이동권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서 왔다”고 했다.

마지막 참석자가 도착하자 2인1조로 4개조가 구성됐다. 한 명은 지도를 보며 조사지점까지 팀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명은 조사 결과를 앱에 등록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마다 담당할 구역과 건물, 점포가 정해졌다. 주로 역 근처 음식점·카페·편의점·약국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찾는 상가를 조사 대상으로 정했다. 기자는 이 대표와 5번째 조를 이뤄 조사활동에 참여했다.

신림동 일대 1시간 돌아보니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16일 계단뿌셔클럽 활동가들이 동네의 계단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최유진 PD

방법은 간단했다. 길 안내 조원을 따라 현장에 도착하면 ‘계단정복지도’ 앱에서 해당 점포를 검색해 정보를 입력하는 식이었다.

▶ 1층에 있는 장소인가요? = 네, 1층이에요/ 아니요
▶ 입구 사진을 찍어주세요 (최대 3장)
▶ 입구에 계단이 있나요? = 있어요/ 없어요
▶ 계단이 있다면 = 1칸/ 2-5칸/ 6칸 이상
▶ 입구에 경사로가 있나요? = 있어요/ 없어요

간단한 질문인데 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휠체어로 쉽게 오를 수 없는 단차를 계단으로 봐야할까. 주저하는 찰나에 이 대표가 “눈대중으로 엄지 한 마디보다 높으면 계단”이라고 설명했다. 점포 앞 튀어나온 석재는 엄지 한 마디 높이였다. 앱의 ‘계단이 있다면’ 조사문항에 ‘1칸’이라고 기록했다.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16일 본지 기자가 엄지 한 마디를 대고, 단차를 재고 있다. 계단뿌셔 클럽은 ‘눈대중으로 엄지 한 마디 이상’ 높이를 계단이라고 본다. 최유진 PD

‘엄지 한 마디’라는 기준은 이 조사를 이용할 이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도 큰 장벽이 될 수 있다.” 한 장애인이 이 대표에게 한 말이 계단뿌셔클럽의 기준이 됐다. 휠체어 이용자인 박 대표는 19일 통화에서 “5cm나 10cm처럼 엄밀한 규격보다 직관적 기준을 두는 게 쉽고 기억하기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맛집을 찾을 때마다 생각보다 갈 수 없는 장소가 많아 불편함을 겪어왔다”며 “메뉴도, 가격도, 리뷰도 미리 볼 수 있는 세상에 계단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생각하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직접 서비스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정보 입력만큼 ‘사진 찍기’도 중요했다. 점포 전경과 계단 형태가 잘 보이는 사진은 계단뿌셔클럽이 수집하려는 핵심 정보다. 이 대표는 “현장사진을 봐야 각자 다른 신체 조건에 따라 혼자서도 갈 수 있는지, 동행인이 있어야 갈 수 있는지 당사자가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본지 기자가 지난 16일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한 상가의 계단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최유진 PD

기자는 이날 한 시간 동안 총 14곳의 카페·음식점을 돌았다. 영업 중인 10곳 중 휠체어가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한울림장애인자립생활센터’ 건물의 경사로가 있는 1층 카페 1곳 뿐이었다. 나머지 가게들은 가게 입구에 손 한뼘 높이의 단차가 있거나, 2층인데 엘레베이터가 없었다. 건물 앞에 주차된 차량 때문에 휠체어 진입이 불가한 곳도 다수였다.

서울 관악 신림동에서 지난 16일 계단뿌셔클럽 활동가들을 인솔한 관악지부 파트너들. 최유진 PD

한 시간 후 처음 집결장소에서 다시 만난 참가자들은 휠체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점포는 한두 곳에 그쳤다고 했다. 관악구 주민 양계성씨(61)는 “어르신들이 갈 법한 대형 음식점에도 계단이 있어 의아했다”며 “37년 이곳에서 살았는데 음식점·편의점마다 계단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김효민 계단뿌셔클럽 관악지부장(26)은 “동네에 옛날 건물이 많아 계단이 주로 복잡한 형태를 띄고 있다”며 “다 뜯어고칠 수 없다면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절충점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계단뿌셔클럽의 두 공동대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동네의 정보를 등록한다면 정보가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모일 것”이라며 “휠체어·유아차, 노인 등 교통약자들이 앱에서 정보를 미리 찾아 편하게 원하는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들은 20일 장애인의 날에 맞춰 계단정복지도 앱 정식 버전을 안드로이드·애플 앱스토어에 배포한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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