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을 주고싶어”···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차렸다

유경선 기자 2023. 4. 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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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위한 보호작업장 ‘래그랜느’에서 남기철 이사장(70)의 아들 범선씨(41)가 쿠키를 만들고 있다. 강남구 제공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고민이 깊어졌다. 당장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들이 ‘수용자’ 신세를 넘아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고민 끝에 직접 장애인을 위한 작업장을 만들기로 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장애인 보호작업장 ‘래그랜느’를 운영하는 사단법인 밀알천사의 남기철 이사장(70)의 이야기다. 래그랜느는 30여 종의 쿠키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그는 자폐성 장애 2급을 가진 아들 범선씨(41)를 위해 2010년 이곳을 차렸다. 래그랜느에는 아들을 포함해 1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자폐 아이를 계속 집에 데리고 있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차린 작업장에서 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폐성 장애인들에게는 일상생활의 자립을 위해 규칙적인 일상을 체험하는 작업장이 그 어떤 장애 시설보다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됐다.

“365일 똑같은 집에서, 늘 보던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비장애인들도 그렇게 지내기가 힘든데 자폐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작업장에 출근을 하고, 손을 움직여 일을 하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는 일상은 돌출행동이 줄어드는 등 증상을 뚜렷하게 완화시킨다.

“자폐성 장애에 특히 좋은 건 ‘다양한’ 작업이에요. 처음에는 비누 만들기를 했었는데 공정이 간단하니 그 작업에만 꽂혀서 다른 건 하지 않으려 하더라고요.”

이후 작업은 30종류가 넘는 쿠키 만들기로 바뀌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에는 경기 포천에 농장도 마련해 직원 13명은 이곳에서도 일한다.

래그랜느 작업장에서 남기철 이사장(70)과 아들 범선씨(41)의 모습. 강남구 제공

보호작업장은 가정에서의 ‘분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남 이사장은 발달장애 자녀를 돌보던 부모가 자녀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돌봄 살인’을 볼 때마다 남일 같지 않다.

“집에만 있으면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어요. 매일 부모와 있는데 아이들 눈에 부모의 단점은 안 보이겠어요? 가정 내 비극을 막으려면 결국 분리가 핵심입니다.”

남 이사장이 1995년부터 28년째 자폐성 장애인들과 함께 주말 산행을 하고 있는 것도 각 가정에 ‘분리’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대부분 엄마들이 돌봄을 전담하잖아요. 엄마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야 돼요. 5시간 정도는 믿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작업장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강남구에는 9개의 보호작업장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부자인 자치구에서도 작업장이 부족하다”라며 “수요에 비해 작업장이 부족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해 일반 작업장의 경우 근속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반 작업장 등의 경우 장애인들의 근속 기간은 평균 3~5년인 반면 래그랜느의 경우 5~10년으로 상대적으로 길다. 결국 더 많은 작업장이 마련되기 위해선 공공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실정에 맞지 않는 일괄적인 규정들이 작업장 신설의 문턱을 높인다면서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폐성 장애인 만을 위한 작업장을 차리려고 해도 현재 규정상으론 청각·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안내판, 경사로, 엘리베이터 시설을 모두 갖춰야 한다”라며 “저의 경우 사비를 털어 이런 시설들을 모두 설치했지만 향후 장애 종류에 따라 관련 규정을 탄력적으로 하는 등 개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기철 이사장은 아들 범선씨와 자주 여행을 다닌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에서 함께 있는 두 사람. 본인 제공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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