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아닌 미국을 의심하는 대만인이 늘고 있다

최현준 2023. 4. 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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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의 최전선, 대만을 가다
지난달 26일 대만 타이베이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탄 시민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타이베이/최현준 특파원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국교가 있는데도 러시아가 침공하자 파병하지 않았다. 대만은 미국과 국교도 없다. 미국이 유사시 대만에 파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지난달 29일 비가 흩뿌리는 대만 진먼섬(금문도)의 국립 진먼대학에서 만난 황보얼(20)은 최근 1~2년 사이 미국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전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기대가 줄었다는 것이다. 황은 “최근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대만 안보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겠지만, 지금처럼 싸우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만 진먼섬은 본섬인 대만섬과는 200㎞ 떨어졌지만, 중국 푸젠성 샤먼과의 거리는 불과 2㎞다.

대만 남부 가오슝의 가오슝대학에서 만난 장중디(20)도 “대만 자신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 대만에 중요한 나라이긴 하지만,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가오슝은 친미·독립 성향이 강한 현 집권당인 민진당의 오랜 텃밭이다.

2024년 1월 예정된 대만 총통선거를 9개월 앞둔 대만에서 미국에 대한 ‘커지는 의심’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이 무력을 사용한 통일 방침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만은 미국의 ‘무기 판매’ 등 안보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바라보는 대만의 눈이 크게 바뀌었다. 대만인들의 전통적인 ‘미국 의존’ 심리가 ‘미국 의심’으로 바뀐 것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351억달러(45조5천억원)가 넘는 군사 지원을 하고 있지만, 3차 세계대전을 피해야 한다며 직접 개입은 하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대만민의기금회가 성인 1072명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대만 침공 시 미국이 파병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이가 46.5%로 ‘파병할 것’이라고 답한 이(42.8%)보다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넉달 전인 2021년 10월에는 같은 질문에 ‘파병할 것’이라는 답변이 65%로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28.5%)보다 2배 이상 많았다.

과거 중국과의 ‘통일-독립’이 주요 화두였던 대만은 이제 ‘친중이냐, 친미냐’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논점이 됐다. 2018년 이후 대만이 미-중 갈등이 부닥치는 지정학적 격전지가 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 위협을 높이면서 생긴 변화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더해져 대만 여론이 복잡하게 갈라지고 있다.

야당인 국민당의 마잉주 전 총통이 지난달 27일부터 11일 동안 중국을 방문하고, 이틀 뒤 여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지난달 29일 중미 방문길에 나서 미국을 들른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대만 보수세력을 대표하며 오랫동안 집권했던 국민당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정책 기조로 삼고 있다. 이에 맞서 2000년대 들어 집권하기 시작한 민진당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안보와 경제 강화를 주장한다. 두 사람의 출국길에는 각각 다른 진영의 시민들이 공항에 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9일 대만 진먼섬 서쪽 해변에 과거 중국군 침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다. 진먼/최현준 특파원

미국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자 중국과의 교류 확대 요구가 그 틈을 파고들고 있다. 차이 정부 들어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며 생긴 안보 불안으로 인한 피로감이 일차적인 원인이다. 이보다 더 큰 것은 민생에 대한 불만으로 보였다. 지난해 대만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8.8%에 이른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중국인 관광객 271만명이 대만을 찾았다. 그해 대만 전체 관광객의 22.9%이다. 티에스엠시(TSMC) 등 대만 첨단기술 기업이 집중된 신주 과학단지에서 만난 가오위판(29)은 “미국은 대만에 무기를 팔 생각만 하는 것 같다”며 “중국은 많은 사람이 대만에 관광 오고 돈도 많이 쓴다. 대륙에서 관광객이 많이 와야 우리 생활도 나아진다”고 말했다. 그 때문인지 지난 1월 민의기금회 여론조사에서 ‘현 정부의 경제 성과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만족한다’는 답변은 34.9%(불만족 51.7%)에 그쳤다. 대만은 지난해 1인당 국내총소득(GNI)이 3만3565달러로, 한국(3만2661달러)을 앞섰지만, 대졸자 초봉이 월 120만~150만원으로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분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 확대 요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만의 정체성이었다. 타이베이에서 만난 한 30대 회사원은 “대만에서 중국과의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중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적당한 거리는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이후 홍콩에서 벌어지는 ‘중국화 바람’은 대만의 양안 통일 여론을 사실상 잠재웠다. 2018년 지지율이 20%까지 떨어졌던 차이잉원 총통이 2020년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선거 직전 벌어진 중국의 대홍콩 강경책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선거연구센터 조사를 보면, 지난해 말 대만에서 통일을 원하는 여론은 7.2%로, 2018년 15.9%에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이를 잘 아는 중국은 내년 1월 총통선거를 앞둔 대만에 대해 지난해에 견줘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차이 총통의 미국 방문에 대한 군사적 대응은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의 방문 때보다 강도가 훨씬 낮았다.

타이베이·진먼·가오슝(대만)/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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