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사이 인간의 고독 … 드디어 서울 온 호퍼 걸작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4. 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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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국내 첫 개인전
'철길의 석양'(1929).

그는 응시(gaze)의 화가다. 그의 시선은 타인을 겨냥하고, 타인은 그를 쳐다볼 수 없다. 광휘와 어둠, 인위와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선의 이율배반. 그들의 표정은 대개 그림자에 가려져 명징하지 않지만 대상의 고독은 시선만으로 외부에 노출돼 관람객과 동일시된다.

미국 20세기 리얼리즘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개인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가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SeMA) 서소문본관에서 열린다. 2019년 관람객 30만명이 몰리며 말 그대로 '초대박'이 터졌던 데이비드 호크니 전(展)의 흥행을 잇는 2023년 상반기 국내 미술관 최대 전시다. 얼리버드 티켓 10만장이 사실상 매진됐을 만큼 올 한 해 가장 기대를 모은다.

최은주 SeMA 관장은 "올해 SeMA 35주년을 맞아 호퍼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전시를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함께 기획한 걸작전"이라고 소개하면서 "도시 풍경을 그린 호퍼가 왜 도시 이후에 해안가를 갔는지, 이로써 자기 시각을 어떻게 확장해갔는지를 확인 가능한 귀중한 전시"라고 강조했다.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소장한 호퍼 작품을 '통째로' 옮겨온 듯한 이번 전시는 휘트니미술관이 보유한 호퍼 회화 222점, 드로잉 2847점 가운데 회화 160점과 아카이브 110여 점 등 총 270여 점을 전시했다. 호퍼 개인전이 국내에서, 그것도 대규모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학생 시절의 호퍼가 20대 초반에 그린 손 드로잉 사이로 그의 어두운 자화상 두 점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그의 화법이 완성되기 전의 초기작으로, 빛과 그림자에 대한 습작 욕망을 감지 가능하다. 암막을 배경으로 얼굴 뺨 한쪽엔 빛이, 다른 뺨엔 어둠이 담긴 '자화상'(1903~1906)은 평생을 지배할 그의 주제의식을 암시한다. 반면 호퍼가 마흔을 넘긴 뒤 남긴 또 다른 작품 '자화상'(1925~1930)은 밝은 톤이 특징인데, 이는 호퍼 자신이 어두운 세계에서 나와 빛의 세계로 가는 여정에 진입했음을 일러준다.

뉴욕에 거주했던 호퍼는 오랜 기간에 걸쳐 파리를 3회 여행한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의 붓 안에서 감정과 생명을 부여받았다. 턱시도 차림으로 카페 테이블에 앉은 흰 콧수염의 노신사, 흉부를 앞으로 또 둔부를 뒤로 내민 매춘부, 꽃장식이 화려한 대형 챙모자를 착용한 귀족여인, 정면을 쳐다보는 흰 셔츠의 노동자 등을 그린 작품이 대표적이다. '비스트로 또는 와인가게'(1909)는 파리의 전형적인 건물인 아치형 다리와 그 위를 휘날리는 네 그루의 나무를 그렸는데, 화면 대부분을 빈 공간으로 남겨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매력적인 시선이 특징이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파리 연작 중 압도적인 그림은 '푸른 저녁'(1914)이 아닐 수 없다. 하얀 분장을 한 피에로를 중심에 두고 짙은 화장의 매춘부, 고위직 군복 차림의 군인, 턱시도를 입은 귀족이 그를 둘러싼 카페 풍경이다. 저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어떤 교감도 없이 홀로 생을 견디는 존재들로 느껴진다.

뉴욕 풍경을 담아낸 호퍼의 에칭 연작은 고독에 관한 한편의 본격적인 연대기로 읽힌다.

에칭 작품 중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밤의 그림자'(1921), '뉴욕 실내'(1921), '밤의 창문'(1928), '황혼의 집'(1935)은 훗날 호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명확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4년 영화 '이창'을 떠올리게 만든다. 화가의 시선은 뭔가를 뒤집어쓰려는 여성의 뒷모습이나 발레복을 입고 바느질을 하는 듯한 소녀의 뒷모습을 담아낸다. 이는 분명한 관음증적 시선이다. 좁은 창문(창틀)의 내부에서 이뤄지는 작가와 관객의 시선은 '이창'을 닮아 있다. 실제로 히치콕은 호퍼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바 있다.

'자화상' (1925~1930).

이번 호퍼 전시 최대작은 '철길의 석양'(1929)으로 기록될 만하다. 지평선처럼 도열한 녹색 언덕 위로 적황색 노을이 비치고, 그 흐름에 무심한 듯 아무도 없는 망대 하나가 세워진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호퍼의 빛은 강렬했던 한때를 움켜쥐어 시간의 어느 한순간을 낚아채 박제하는 빛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예감하고 인정케 해 무력감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중적 암시에 가깝다. 그는 빛으로 시간을 그리고, 그 시간의 공허에 진입한 인간 태생의 고독을 예고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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