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어 EU도 '반도체 자국주의' 강화…글로벌 반도체 경쟁 심화(종합)
(서울=연합뉴스) 장하나 기자 = 유럽연합(EU)이 18일(현지시간) 총 430억 유로(한화 약 62조원)를 투입해 EU의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반도체법 시행에 합의하며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EU까지 공식 참전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EU, 반도체 점유율 20%까지 확대 목표…"직접적 영향 적어"
19일 업계에 따르면 EU 반도체법의 핵심은 2030년까지 민간과 공공에서 430억 유로를 투입해 EU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EU는 세계 반도체 수요의 20%를 차지해 미국과 중국에 이은 3대 소비시장이지만, 반도체 공급망 점유율은 10%에 불과한 상황이다.
대부분 반도체 생산을 외부에 위탁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회사) 기업이 많아 생산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네덜란드 NXP와 독일 인피니언,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주요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은 대만 TSMC와 UMC 등에 주로 생산을 맡기고 있다.
대신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는 유럽 기업의 경쟁력이 독보적이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해 '슈퍼 을'로 불리는 네덜란드 ASML이 대표적이다.
이사회와 유럽의회 승인 절차를 거쳐 관보에 게재되는 최종 확정 법안 내용을 살펴봐야겠지만, 현재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의 생산 시설이 EU에 없는 만큼 당장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EU가 반도체를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역내 반도체 생산 역량 강화와 공급망 안정화에 적극 나서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EU의 반도체 제조 역량이 강화될 경우 글로벌 경쟁은 더 심화할 전망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유럽은 경쟁력 있는 분야가 차량용 반도체를 비롯한 시스템 반도체로, 우리와 직접적인 경쟁 관계는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려는 상황에서 잠재적인 경쟁자로 부상한 데다, 향후 경쟁 구도가 변하고 더 치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그동안 유럽 반도체 장비 회사로부터 우리가 우선순위로 공급받았는데 앞으로 유럽에 팹을 짓는 회사에 우선 공급될 가능성이 있다"며 "장기적으로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파운드리 3사에 '손짓'…유럽 투자 여건 따져봐야
이에 따라 TSMC와 삼성전자, 인텔 등 파운드리 회사에 대한 유치 경쟁이 활발해지며 이들 회사의 투자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을 줘서라도 반도체 기업을 키우고 역내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라며 "유럽에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별로 없는 만큼 결국 TSMC나 삼성전자 등에 유럽으로 들어오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실제로 TSMC는 독일 드레스덴 반도체 공장 건설 준비에 속도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설명회에서 유럽에서 고객·파트너·차량용 기술에 집중한 특수한 제조공정 웨이퍼 공장 의제에 대해 관련 가능성을 평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21년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한 미국 인텔의 경우 작년 3월 유럽 전역에 800억 유로를 투자,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영국의 팹리스 ARM과 파운드리 분야 '깜짝 동맹'을 선언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방한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잇따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찾고 주요 경영진과 만난 것도 반도체 공급망 강화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다만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300조원을 투자해 경기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만큼 업계에서는 당분간 유럽 내 생산시설 구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럽의 물가나 인건비 등 투자 여건도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인텔의 경우 투자 계획 발표 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건설 예정인 반도체공장과 관련해 최대 50억 유로의 추가 보조금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줄다리기가 진행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EU 반도체 법안에는 역외 기업에 대한 명시적 차별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며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기회 요인은 극대화할 수 있도록 EU 당국과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자국주의 가속화
이미 글로벌 반도체 자국주의 경향은 심화하는 추세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390억달러)과 연구개발(R&D) 지원금(132억달러) 등 5년간 총 527억달러(약 69조5천억원)를 지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지원법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보조금 지급 요건으로 기밀 정보 제출, 초과이익 환수 등의 무리한 조항을 내걸었음에도 전 세계 200곳 이상의 기업이 보조금 신청 의향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의향서 제출 여부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170억달러(약 22조5천억원)를 투입해 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50억달러(약 19조9천억원)를 메모리 반도체 첨단 패키징 제조시설 등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공장 부지를 선정하지는 않았다.
SK하이닉스는 이와 관련해 "미국 내 첨단 패키징 투자와 관련해 부지 선정 등 적극적인 검토를 진행하고 있으며,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미 연방정부의 칩 프로그램 보조금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도 공급망 재편에 대응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정부는 용인에 710만㎡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 2042년까지 첨단 반도체 제조공장 5개를 구축하고 국내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 팹리스 등 최대 150개를 유치할 계획이다. 반도체 등 국가 전략 산업에 설비 투자 시 세액 공제율을 확대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이달 11일 공포됐다.
김양팽 연구원은 "(반도체 육성을 위해) 발표된 내용이 조속히 이행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hanaj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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