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이슈] 한은사(寺) 꼬리표 뗀 이창용 1년… 위상 높아졌다 평가 속 독립성 우려 공존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로 시장과 소통
한국식 점도표·정책 예고 도입
직설 화법이 시장 혼란 키우기도
한은 직원 “처우 개선 미흡”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오는 21일 취임 1주년을 맞는다. 정통 ‘한은맨’이 아닌 외부 출신인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라는 다소 경직된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1년 전 업무를 시작했다. 이 총재는 서울대 교수를 거쳐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일한 바 있다.
이 총재는 지난 1년 동안 모호함을 미덕으로 삼아온 이전 총재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명확하게 통화정책 결정을 시장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기존에 시도한 적이 없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통화정책방향 사전 안내)를 도입한 게 대표적이다.
그 결과 미래 통화정책에 대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고, 절간 같이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다는 이유로 붙여진 ‘한은사(寺)’라는 꼬리표를 어느 정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총재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은 한 때 채권시장 혼란을 키웠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된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공조’ 기조 속에서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 투명한 소통 행보…한국식 점도표 첫 도입
이 총재 취임 이후 한국은행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소통 방식이다. 이 총재는 지난해 5월 26일 첫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당분간 물가에 보다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면서 사실상 추가 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나아가 ‘당분간’은 ‘수 개월’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전 총재들이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은 제시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길 정도로 모호한 문구를 사용해온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당시 시장에서는 이 총재의 화법을 두고 “직설적이고 명료하다”고 평가했다.
이 총재는 연준 등이 사용하는 포워드 가이던스와 한국식 점도표(금리인상 예상표)도 처음 도입했다. 시장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통화정책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다. 이 총재는 “그간 한국은행은 대외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특성을 고려해 미래 통화정책 경로에 대해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왔지만, 금융통화위원의 생각을 시장과 보다 투명하게 소통하기 위해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 총재는 지난해 11월 통화정책방향 회의부터 금통위원 6명이 제시한 최종금리 수준을 공개했다. 당시 그는 “이번 회의에서 금통위원 3명은 최종금리 수준을 연 3.5%로 봤고, 나머지 3명은 3.75%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직원들도 통화정책 수행과 관련한 이 총재의 업무 능력에는 ‘합격점’을 줬다. 한국은행 노동조합(노조)은 지난 18일 낸 ‘이창용 총재 취임 1주년 설문 결과’에서 “이 총재 취임 이후 국내외에서 한은의 위상이 이전보다 올라갔음을 체감하고 있고 통화정책 및 금융안정 부문에서 총재의 업무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조는 “당대의 석학이자 대한민국의 대표 이코노미스트인 이 총재의 학식과 전문성, 국제 경제 흐름에 대한 이해도, 탁월한 대외 교섭력 등이 종합된 결과로 풀이된다”고 덧붙였다. 해당 설문조사는 직원 1002명을 대상으로 이달 3~13일 사이 진행했다.
◇ 한때 채권시장 혼란 키웠다는 지적도
그러나 이 총재의 직설적인 화법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난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는 등 금융·외환시장이 요동쳤다. 한국은행도 이런 흐름에 맞춰 사상 첫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하는 등 기준금리를 7연속 인상했다.
문제는 시장 상황이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이 총재가 제시하는 포워드 가이던스가 단기간에 바뀌면서 시장 혼란이 가중됐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이 총재는 사상 첫 빅스텝을 밟은 지난해 7월 금통위 직후 “금리를 당분간 0.25%포인트씩 점진적으로 인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8월 말 잭슨홀 회의에서 공격적인 금리 인상 기조를 지속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이 총재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연준이 9월에 점도표를 통해 최종금리 수준을 높이자 한국은행도 포워드 가이던스를 수정한 뒤 10월에 두번째 빅스텝을 단행했다.
채권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포워드 가이던스를 9월 말에 갑자기 수정하면서 채권가격이 급락했다고 비판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은행이 공신력을 잃지 않으려면 기존의 ‘전략적인 모호함’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말이 자주 바뀐다”는 시장의 비판에 대해 이 총재는 “저의 포워드 가이던스는 ‘조건부’로, 조건이 바뀌면 시장이 미리 (금리 전망 경로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포워드 가이던스는 전제 조건이 달라지면 바뀔 수 있고, 서약이나 약속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 “정부와 소통 강화” VS “중앙은행 독립성 저해”
이 총재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협력을 중시하는데, 이 역시 이전 총재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IMF에서 8년간 아시아·태평양 국장을 지내면서 국가와 지역 경제 전반을 살펴보는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은의 역할을 재설정한 셈이다. 이 총재는 취임 직후 “물가 안정만 보면서 독립성을 강조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달라졌다”면서 “정부와 대화를 통해 정책을 조율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와의 정책 공조는 몇 차례 비상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시장이 경색되자 한국은행은 정부와 협의해 6조원 규모의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하고 대출적격담보증권 대상을 확대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로 치솟은 지난해 9월에는 외환시장 안정을 목표로 국민연금과 외환스와프를 체결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와의 정책 공조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저해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 경제·금융 수장들과 정기적으로 회동을 하는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주관하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중앙은행의 영역인 통화정책 관련 발언까지 선점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면서 한국은행 내부에서 불만이 쏟아지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열린 회의에서 추 부총리가 “물가에 중점을 둔 통화정책 운용하겠다”고 언급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이 최우선 목표인데, 정부와의 협력을 강조하면 중앙은행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성장률이나 부동산 시장 상황 등으로 관심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총재는 보수적인 한국은행 문화를 바꾸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한은 노조는 “이 총재가 취임 직후 겸손한 자세로 일상 가운데 직원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에서 직원들은 잠시나마 그 진정성을 느꼈다”면서도 직원 불만의 주요 원인인 보수와 복지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노조는 “한국은행의 경영층은 직원들에게 ‘한국경제의 콘트롤타워’ 급 능력을 요구하지만 임금 수준은 금융공기업 바닥 수준”이라며 이 총재가 취임사에서 언급한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구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총재가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시의적절하게 통화정책을 운용했고, 한국은행의 연구 역량을 강화한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다만 금융당국이 은행에 대출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등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메커니즘을 무력화하는 시도를 했을 때 강하게 대응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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