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환위험 없는 중남미 진출 인큐베이터

한겨레 2023. 4. 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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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운하는 파나마 경제의 핵심 축이다. 파나마 운하의 대서양 쪽 전경.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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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파나마를 설명할 때 항상 다섯 가지가 없는 5무(無)의 나라라며 시작한다. 우선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가 거의 없다. 파나마 하면 파나마운하를 떠올리는데, 20세기 초 미국이 파나마운하를 건설하기 전 니카라과의 운하 건설도 같이 검토했다. 그러나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섬의 화산 폭발로 3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뒤 화산이 있는 니카라과는 후보지에서 제외됐다. 당시 니카라과 우표에 화산 그림이 많은 게 한 원인이 됐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한국 상선들이 니카라과 운하를 지금 누비고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1990년대 초반 이후 유혈 사태 없이 정권 교체가 안정적으로 이어져 정치 불안이 없다. 중남미 내 대표적 친미 성향의 국가이며, 최근 중남미 관련 주요 이슈 중 하나인 ‘핑크 타이드’(좌파 정권의 연이은 집권)에서도 동떨어져 있다.

코스타리카와 더불어 군대가 없다는 점이 셋째다. 전란의 위험이 없다는 의미다. 넷째로 중남미 국가로는 드물게, 적어도 수도 시내에선 일몰 뒤 도보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치안 위험이 적다. 중남미 국가 중 실외에서 마음 편히 휴대전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끝으로, 미국 달러를 법정통화로 사용하므로 중앙은행이 없고, 환율 불안정에 따른 환(換)위험도 없다. 미화 사용의 반작용으로 물가 수준이 높지만, 환율 불안정으로 흑자 기업이 적자 기업이 되는 게 다반사인 중남미에서는 큰 장점이다.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한 것은 1903년,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14년 파나마운하가 완공됐다. 파나마인이 운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바라볼 때의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건설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지형이 바뀌었으며, 중요 자산으로서 국가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운하 인근에서 진행되는 공사에 파나마 정부가 민감한 것도 운하가 물적 시설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전세계 해상 물동량의 5%가 파나마운하를 거치는 만큼 국제무역에 중요한 인프라로, 한국은 항상 이용국 순위 5위 내에 든다.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 함대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든든한 군사 기반이기도 하다. 연간 통행료 수입만 30억달러(약 4조원)에 이른다. ‘배가 산으로 가는’ 수로를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고도로 정교화된 운용시스템, 역사상 단 두 번만 중단됐을 정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결코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2016년 파나마운하 확장이 완료됐는데, 이 과정에서 전세계 수백 개의 항구와 일일이 조율했다고 알려졌다.

운하는 있고 다섯 가지는 없다

파나마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남쪽 끝에는 수도 파나마시티가, 북쪽 끝에는 제2도시 콜론이 있다. 콜론에는 서반구 최대 경제자유구역이라는 ‘콜론 자유무역지대’가 있다. 중남미 교역의 허브인 이 무역지대에 기업 2500개 이상이 입주했고, 이곳을 통한 재수출 규모는 연간 100억달러가 넘는다. 파나마 자체 수출이 2018년만 해도 연 7억달러에 불과했다는 것과 견줘보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쿠바, 베네수엘라 등 항구가 태평양 쪽으로 열려 있지 않은 중남미 국가는 ‘콜론 자유무역지대’의 가장 큰 고객이다. 이들 나라의 경제가 최근 점차 회복될 기미를 보이면서 콜론의 역할도 다시 커지리라고 예상한다.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의 관문이자 중남미 최대 항공사 코파(COPA)항공의 허브인 토쿠멘공항 내부. REUTERS

수도 파나마시티에는 중남미 최대 항공사 코파(COPA)항공의 허브인 토쿠멘공항이 있다. 코파항공은 북미와 중남미를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웃 나라를 갈 때 자국 직항을 찾기 어려워 파나마를 경유하는 코파항공을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파나마는 중남미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친기업적인 경제정책을 펼쳐왔다. 낮은 금융장벽은 대규모 국제자금을 불러들였고, 이는 2000년대 파나마 발전의 연료가 됐다. 2015년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 이후 다소 위축됐지만, 여전히 금융은 파나마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기간산업이다.

파나마는 다른 중남미 국가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친기업적인 조세제도를 갖추고 있다. 법인소득세 25%, 부가가치세 7%, 자본이득세 10%, 배당소득세 10% 등이다. 현지 기업에 따르면 세율 자체도 유리하지만, 세무 행정이 합리적인 선에서 이뤄지는 것이 무엇보다 강점이라고 한다. 폐업 절차도 투명해 일부 국가에서처럼 외국 기업이 ‘야반도주’하는 일이 드물다. 어떤 행정 업무든 법무법인을 거쳐야 하는 점은 불편하지만, 역량 있는 법무법인을 쓰면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다는 장점도 있다. 수입품 관세도 대부분 10% 이하로 낮게 유지되는데, 특히 한-중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파나마는 2021년 3월부터 발효)되면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더 높아졌다. 중국발 물류비가 워낙 가파르게 오른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다국적기업 지역본부 우대제도(SEM)나 제조기업 우대제도(EMMA)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두 제도의 요건을 충족하는 외국 기업은 법인소득세율을 5%로 줄여주고, 주재원 비자나 현지 직원 의무 채용 비율 등에서도 혜택을 누릴 수 있다. 2007년 도입된 다국적기업 지역본부 우대제도는 한국 대기업 계열 8개사를 포함해, 글로벌 기업 185개사가 활용했다.

친기업·외국인투자 기조 지속

5무(無)의 안정적 여건, 물류 인프라, 친기업·외국인 투자 정책, 그리고 최근 구리 생산 개시에 힘입어 파나마 경제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1만6천달러를 넘어섰다. 인구가 430만 명에 불과하고 소득분포가 고르지 못해 구매력 높은 계층이 얇다는 점,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아 소재·부품·장비 수출 기회가 제한적이라는 점은 시장으로서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중남미 시장 확대를 노리는 기업이라면 파나마 진출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즘같이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국가 간 거리가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여전히 ‘그렇다’이다. 중남미 바이어와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면 시차로 이틀은 기본적으로 지나간다. 주말이 끼면 이게 일주일이 되고, 연말연시 휴업 기간에는 한 달도 금방이다. 언어 문제로 전화 통화가 쉽지 않거니와, 요즘 바이어들은 통화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지에 진출해 즉각적인 응대를 할 수 있어야 거래 성사 확률이 대폭 커진다. 단, 현지 파견직원은 어느 정도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본사에 확인하겠다며 이삼일이 지나가면 그 바이어는 어느새 다른 거래처를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대면 상담의 중요성도 여전하다. 파나마에 자리잡고 있으면 중남미 어느 나라건 최대 8시간 이내에 날아가서 바이어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한 번 잡아둔 바이어는 좀처럼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다. 수출업체가 중남미 바이어와 거래를 성사하기란 어렵지만, 중남미 바이어도 성실한 국외 공급처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문제는 변호사의 공식문서보다는 구두로 해결하려는 것도 중남미 바이어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여러 한국 기업을 지원한 경험에 비춰보면 제품 특성도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맞춤화(Customizing)가 덜 필요한 제품일수록 성사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사후관리(AS)용 자동차부품의 경우 사양은 ‘싼타페용 브레이크 패드’ 등과 같이 이미 정해져 있다.

품질 평가가 끝난 다음에는 단가와 수량에만 합의하면 일사천리다. 반면 사양을 일일이 현지 수요에 맞게 조정해야 하는 제품이라면 앞서 언급한 교신의 장벽, 최소주문수량(MOQ) 문제 등에 막혀 무산되기 일쑤다. 국내 대기업 제조사에 납품하던 기업들이 ‘도면이 오면 무엇이든 납품할 수 있다’며 수출을 시도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대부분의 바이어가 자사 수요에 맞춰 정교한 도면을 보낼 여건이 되지 않는다.

파나마가 중남미 진출의 거점이 될 이유는 연착륙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오가기 편하고, 치안이 양호하며, 안정적으로 현지 지사 등을 운영할 수 있다. 미화를 사용하므로 환율 변동 노출 위험이 적고, 법적 안정성이 높으며, 정보통신 여건도 좋다. 단순히 영업만 하는 경우(판매지사)가 아니라 수출입까지 겸한다면(판매 법인) 콜론 자유무역지대에 창고를 빌려 낮은 비용으로 중남미 전체를 커버할 수 있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적기 공급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기에 제품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요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남미 시장에 안착한 뒤, 필요에 따라 더 크고 더 어려운 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중남미에서 견뎌낼 체력을 다진 뒤 레벨을 높여 도전하는 것이다. 실제 최근 파나마에서 일단 자리를 잡은 뒤 브라질로 이전하는 기업이 나오고 있다. 파나마 내수시장만이 아니라 인큐베이터로서의 잠재력도 볼 필요가 있다.

최원석 KOTRA 파나마무역관 관장 jmorning@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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