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홍어』 문순태 “홍어 비하에 충격… 시로 생명력으로 극복하고 싶었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4. 19.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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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한창이던 몇 해 전, 한동안 서울의 아들 집에 묵게 됐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머물러야 했다. 홍어가 먹고 싶었다. 영산포 출신의 아내는 홍어 요리를 만류했다. 서울 사람들은 홍어를 싫어한다고. 냄새가 밖으로 나가면 당장 위층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고.

홍어탕을 끓였다. 냄새가 행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아파트 창문을 꽁꽁 닫고, 부엌의 커튼까지 내리치고, 환풍기까지 돌려가면서. 보글보글 끓으면서 냄새가 아파트 안에 차오르자, 혹시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지 않을까 심장이 쫄깃해졌다. 알 수 없는 위축감. 옛날에는 이런 생각 없이 그냥 먹기만 했는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라도 사람들과 함께 홍어가 비하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냄새 나고, 보기 흉하다고. 홍어는 관혼상제마다 반드시 나오는 전라도 대표 음식. 삭혀야 풍미가 더욱 깊어지는 홍어의 숙성과 전라도 사람들의 굴곡진 역사와 삶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담양 출신의 작가 문순태는 어떤 슬픔이 감각되기도 했고, 분노 같은 감정도 차올랐다. 단순히 홍어를 먹는 데서 끝내선 안 되겠구나. 어떤 극복의 의지로서 홍어를 써야겠구나.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올랐고,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홍어는 단순하게 먹고 즐기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홍어가 우리 인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홍어는 부레가 없는 물고기여서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살죠. 우리 민초들 역시 기를 펴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사니까요. 홍어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라고 하는 새로운 인식과 관점을 가지면서 시로 쓰게 된 거죠.”

문순태는 3년 전부터 홍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와 홍어 요리를 하나씩 해 먹어가면서 느낌이나 감상 같은 것을 기록했다. 120여 편의 시가 모아졌고, 이 가운데 100편을 추려서 시집 『홍어』(문학들)를 출간했다.

시집에는 살, 무침, 탕, 전, 튀김, 찜, 삼합, 라면탕 등 다양한 홍어 요리는 물론, 홍어의 생태나, 홍어와 연관된 인간의 삶과 역사 등 홍어를 매개로 한 다양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가히 음식시학의 절창이라 할 만하다.

처음 시로 등단해 왔지만, 오랫동안 주로 소설을 써온 중견 작가 문순태는 왜 『홍어』 시집을 써야 했을까. 그는 홍어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문 작가를 지난 13일 왕복 천리길을 넘게 달려서 담양 생오지 집필실에서 마주했다.

홍어는 대표적인 남도 음식이지만, 지금은 전 국민이 즐기는 음식이다. 전라도를 벗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홍어 요리는 삼겹살과 묵은 김치와 함께 먹는 홍어 삼합 요리다.

“가슴 후비는 어울림의 한 판이자/ 입안에 꽉 찬, 이 야만적인 충만감/ 머릿속에 일곱 빛깔 무지개 떠올랐다/ 묵은 김치에 잘 삭은 홍어와/ 기름진 돼지고기 수육 포개 얹으니/ 절묘한 조합으로 폭발하는구나/ 시큼하고 기름지고 알싸한 맛에/ 코에서는 수천 마리 벌 떼가 날고/ 입안에서 요지경 속 떼춤을 춘다/ 다른 것들이라도 셋만 잘 어울리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화음이 잘 맞는 재즈 보컬 트리오 맛”(「홍어 삼합」 전문)

―벌떼가 나는 느낌이라니. 왜 홍어 삼합이 인기일까.

“홍어 자체만으로도 맛이 있지만,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홍어만으론 즐길 수가 없다. 홍어를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삼합이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아울러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려서 이루는 어떤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다 다르지만 조화를 잘 이루면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홍어 요리는 홍어 생살, 이른바 홍어회다. 이전에는 주로 산지에서만 먹었지만, 지금은 유통망이 촘촘해져 전국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게 됐다. 홍어 생살 맛을 노래한 시다.

“흑산 바다에서 갓 올린 홍어/ 살구빛 생살 한 점 입에 넣자/ 온몸으로 날개 파닥거렸다/ 황홀해라, 상큼 짜릿한 첫 경험/ 인절미처럼 난질난질하구나/ 발효되지 않은 홍어 생살은/ 찌르는 듯 송곳 같은 향기 없어도/ 날것 그대로 싱그러움이 좋다/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이 행복/ 오래 씹을수록 사랑이 깊어진다”(「생살 홍어 맛」 전문)

―홍어 생살 맛을 ‘날개가 파닥거린다’거나 ‘인절미 맛’으로 표현했는데.

“전라도에선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 삭힌 홍어를 먹는다. 반면 흑산도 사람들은 생 홍어를 먹는다. 인천에도 홍어가 많이 나오는데, 주로 생살을 먹는다. 삭히지 않는 생살 홍어도 매우 쫄깃쫄깃하다. 홍어를 못 먹는 사람도 잘 먹는다. 숙성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맛의 순결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조미료를 치지 않고 만들어주신 청국장, 쑥떡 같은.”

홍어 요리는 냄새, 아니 향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냄새인가 향기인가3」는 홍어 향기가 나이와 사람에 따라서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재미있게 그린 시편이다.

“어린 시절 홍어 처음 먹었을 때/ 방귀 냄새에 문 박차고 뛰쳐나갔고/ 소년 시절에 시궁창 냄새에/ 손바닥으로 코를 쥐어 막았고/ 장가가던 첫날밤엔/ 잘 익은 수밀도 냄새에/ 왈칵 눈물이 벅차올랐다/ 막걸리 안주로 먹을 때 찔레꽃 향기/ 소주와 먹을 때 톡 쏘는 장미향/ 맥주와 먹을 때 달달한 밤꽃 향기/ 늙은 친구들과 먹을 때/ 은근한 살 냄새로 변했다/ 냄새가 향기 되기까지 20년,/ 향기가 사람 냄새 되기까지/ 50년이나 걸렸다/ 산수를 넘긴 지금은/ 오래 살아 달빛에 하얗게 바랜/ 그리운 사람의 마음 향기”(「냄새인가 향기인가3」 전문)

―홍어가 정말 향기로, 다시 마음의 향기로 바뀌었는가.

“홍어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냄새가 아니라 향기로 받아들인다. 저 역시 홍어를 냄새가 아닌 향기로 받아들인다. 냄새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 모두 포함하지만, 향기는 좋은 것만 있다. 나쁜 향기란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렀고, 지금은 홍어에서 사람 냄새를 느낀다. 인간의 본질적인 냄새가 바로 살 냄새다.”

시집은 홍어 요리를 넘어서 홍어 생태로도 나아간다. 홍어는 부레가 없어서 바다 밑바닥에서 주로 사는 심해어.

“삶은 밑바닥은 경계가 없어서/ 끝없이 가라앉을 수 있다/ 꿈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무력증 때문만은 아니다/ 홍어는 공기주머니가 없어서/ 솟구쳐 오래 떠 있지 못하고/ 바다 밑에 엎드려 산다/ 우아한 날개와 꼬리만으로는/ 트위스트도 출 수도 없다/ 부레는 애드벌룬 같은 것/ 나 역시 공기 주머니가 없어서/ 소리 없이 날마다 추락하고 있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홍어는 부레가 없다」 전문)

―부레가 없어 바다 밑에서 사는 홍어와 서민들의 삶을 비교했는데.

“홍어는 부레가 없어서 오래 뜨지 못하고 바다 밑에서 가라앉아서 생활한다. 심해어라고 하는 이유다. 어떤 의미로 부레 없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어머니나 농사꾼들은 다 밑바닥에서 살았다. 노비나 천민 계급들은 더 밑바닥에 살았고. 그렇다고 꿈까지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날마다 가라앉고 있다. 젊었을 때는 부레가 있어서 돈도 모으고 승진도 하고 아이들도 크면서 떠오르는 것 같은데, 나이가 꺾어지면서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결국 가라앉는다.”

홍어의 성생활도 인상적이다. 수컷 홍어는 교미 중에 암컷이 사람의 낚시에 걸리게 되면 함께 따라 올라올 정도로 사랑에 진심이다. 시 「해음어」는 홍어의 사랑을 그렸다.

“부러워라/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랑/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온몸 떨리는 뜨거운 희열/끝내 뿌리치지 못하네/ 휘감은 긴 팔 풀지 않고/ 마지막 가는 길 따라가는/ 숙명 같은 해음어 사랑/ 한 몸에 생식기 두 개 달고도/ 평생 오직 한 짝만을 품어 온/ 오, 순결한 영혼이여”(「해음어」 전문)

―홍어의 사랑이 그렇게 정열적인가.

“수컷 홍어는 생식기가 두 개이고, 암컷은 하나다. 1년에 새끼를 두 번밖에 낳지 않는다고 한다. 수컷 홍어는 짝짓기 도중에 암컷이 낚시에 걸리게 되면 함께 따라 올라온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저 혼자 살려고 빠져나가지 않는다. 홍어의 사랑법이다. 그래서 음탕한 물고기라고 해음어라고 부른다.”

시집은 홍어 요리와 홍어의 생태, 홍어 문화를 넘어서 급기야 역사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19세기 우이도에서 실학자 정약용과 홍어장수 문순득의 우정과 삶으로.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마흔네 살 정약전/ 얼어붙은 겨울바다 끝, 우이도에 귀양 오고/ 홍어장수 문순득은 표류하다 길을 잃었네/ 3년 2개월 지나 서당골에서 만난 두 사람/ 약전은 순득에게 하늘 아래서 맨 처음으로/ 넓은 세상 보았다며 천초 호를 주었네/ 순득은 약전을 통해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약전은 하늘만큼 너른 세상 처음 알았네/ 삶의 길이 꼭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둘의 만남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약전이 59세, 유배 16년 만에 눈 감으니/ 우이도가 온몸 흔들며 파도치듯 울었네/ 순득은 홍어 들고 서당골 상가로 달려가/ 밤새도록 통곡하며 홍어잔치 벌였다네/ 두 사람은 홍어와 함께 시간 속을 헤엄치고/ 홍어 때문에 끝내 헤어질 수가 없었다네”(「실학자 정약전과 홍어장수 문순득2」 전문)

―정약전과 문순득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19세기 초 홍어장수 문순득이 표류 끝에 오키나와와 필리핀, 마카오, 중국을 거쳐서 3년 2개월 만에 우이도로 돌아왔다. 정약전은 이렇게 많은 외국을 돌아다녀본 사람은 처음 만나서 시야가 확 넓혀졌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표해시말」을 썼다. 지금 우이도에 가면 문순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마카오에선 일 년에 한 번씩 축제가 열린다.”

홍어 요리와 생태, 문화와 역사를 더듬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홍어가 된 착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은 홍어의 꿈까지 꿀 지도.

“내가 가고 있는 낯선 이 길/ 언제쯤 어둠의 끝이 보일까/ 지금 고향 바다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터/ 미지의 힘에 끌려, 끝도 없이/ 가라앉는 무력감과 함께/ 사라져 가는 희미한 그림자여/ 날개 있어도 날지 못하고/ 죽어서는 항아리 속에서 삭아/ 불꽃같은 향기로 피어올랐고/ 온몸 꽃잎처럼 약해 저며졌다/이 슬픈 운명, 거부할 수 있다면/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이승 떠난 뒤 누가 나를 위해/ 진혼가 불러준다면/ 죽어서도 바다 꿈꿀 수 있으련만”(「홍어의 노래」 전문)

―홍어의 마음으로 홍어를 노래했는데.

“홍어 시를 쓰면서 어떻게 보면 내가 홍어 같고 홍어가 나 같은 감정, 동일화를 자주 느꼈다. 홍어의 모습을 보면 늙고 추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고. 또 한 보름 동안 항아리 속에 갇혀 삭히는 과정이나 미학이,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사회를 접하면서 자아가 조금씩 변하는 제 삶과 비슷한 것 같다. 홍어와 내가 동일시되면서 홍어의 꿈이 이제 제 꿈이 된다.”

삭히고 저며져서 몸속으로 들어와 영양분이 된 홍어는 마침내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마지막 시 「내 안에 살아 있는 너」는 바로 그 마음을 비춘 시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홍어들의 고향 흑산도 앞바다 출렁이는데/ 아직까지도 우아하게 춤추는 내 모습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눈빛 마주치지 않아도 내가 왔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으련만/ 너는 뭍에 나온 후 진흙처럼 찐득하게 배 깔고 엎뎌만 있었다/ 내 몸에 들어와서 비로소 파닥거리며 굳은 혀를 춤추게 했다/ 오래오래 씹으면서 날개 친 그 처절한 율동 음미할 수 있었다/ 너의 주검은 모두에게 익숙했으나 살아 있는 모습은 늘 생소했다/ 내게는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구나/ 죽어서야 나의 식구가 되고 더불어 살아가는 까닭 이제 알겠다”(「내 안에 살아 있는 너」 전문)

―마침내 홍어가 마음속에서 살고 있게 됐는데.

“수족관에 가면 홍어가 없다. 다 죽어 있거나 삭혀 있는 것들만 본다. 살아있는 홍어를 우리가 보기가 어렵다. 살아 있는 홍어는 결국 내 마음속에 있게 되는데, 홍어의 어떤 생명성을 그린 것이다.”

―이번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경쟁사회인 도시에선 여유가 없었다. 신문 기자를 했고, 교수 생활도 하면서 정신없이 살아왔다. 작가여서 열심히 작품도 써야 했다. 술도 마시지 않고 일찍 집에 들어와 새벽 3시면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소설을 썼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쓰는 등 치열하게 살다가 퇴직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시골에 와서 하루 종일 자연에서 생활하니 자연히 하찮은 풀잎이나 작은 들꽃 같은 것에 관심이 가더라. 작가란 이 작은 것을 통해서 우주를 보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시골로 돌아오니 시적 감흥이 불타올랐고 시가 막 쏟아졌다. 소설은 상당히 과학적인 글이다. 구성도 정교하게 짜야 하고,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하며, 인물과 주제도 잘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시는 과학정신과 거리가 멀더라. 대신 섬세한 감정이나 몰입, 은유적 언어가 필요했다. 이곳에 와서 시집 『생오지에 누워』, 『생오지 생각』을 펴냈다. 그러다가 홍어에 대한 비하 발언이 상처가 됐는데, 시를 써서 극복해보자고 생각했다. 원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력, 생명력으로 극복하고 싶었다. 3년에 걸쳐 쓰고 1년 동안 꼼꼼하게 다듬으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광주고 1학년 시절, 국어 시간에 담당 교사인 수필가 송규호씨는 글을 써서 내라고 과제를 냈다. 친구들과 함께 글을 써서 냈는데, 송 교사는 글을 잘 썼다고 칭찬했다. 그러더니 교무실로 데려간 뒤 문예부에 들어가 보라고 조언하는 게 아닌가.

학생 문순태는 문예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나중에 시인이 되는 친구 이성부를 만났고, 이성부와 함께 시인 김현승씨의 집을 자주 찾아다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해왔던 그는 이즈음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문순태의 원점이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로 있던 시절, 독일문화원 추천으로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1년간 독일어 연수를 다녀왔다. 귀국했을 때엔 1972년 시월유신 뒤라서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1973년, 그는 소설을 써서 유신에 대항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신문사 입사 이듬해 『현대문학』에 추천을 통해 등단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시를 쓰지 못한 그였다.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써지진 않았다. 오랜 기자 생활 때문인지 내용이 너무 사실적이고 상대적으로 주제의식이 미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장의 밀도가 약하고 드라이하다는 비판도 역시. 주제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드라이한 문장을 고치기 위해서 형용사나 부사를 많이 써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설가 친구 한승원을 만나거나 김동리 선생을 찾기도 했다.

1939년 담양에서 태어난 문순태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로 추천받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백제의 미소〉가 당선돼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 『걸어서 하늘까지』, 『피아골』, 『철쭉제』, 『삼형제』, 『징소리』, 『된장』, 『생오지 뜸부기』 등을, 시집 『생오지에 누워』, 『생오지 생각』 등을 펴냈다. 특히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9권)을 펴냈다. 한국소설문학작품상, 문학세계작가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요산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송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설명한다면.

“저의 대표작으로 평론가들은 교과서에 실린 『징소리』와 『철축제』를 꼽지만, 개인적으론 『타오르는 강』을 꼽는다. 처음 얼마간 민속적이고 토속적인 이야기를 쓴 뒤, 한동안 사회고발 정신이 강한 리얼리즘 소설을 써왔다. 하지만 주제 의식이 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따라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서 쓴 작품이 『징소리』와 『철쭉제』였다. 『징소리』는 장성댐 수몰 사건을 배경으로 우리시대 고향 상실의 의미를 파고들었고, 『철쭉제』는 민족동질성 회복 문제를 천착한 작품이었다. 다시 60세가 넘어서면서 세상과 삶을 좀더 총체적으로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산다는 것은 구도의 길 찾기라는 차원에서 세상과 삶을 보는 작품을 썼던 것 같다.”

기자 시절이던 1970년대 초, 나주 금성동 나주 나씨 종가집을 찾았다. 시리즈 「종가」 연재를 위해 전라도 종가들을 취재하던 그였다. 나이가 80세쯤 돼 보이는 할머니가 인자한 모습으로 맞았다. 할머니는 이날 빛바랜 종이를 가져와서 보여줬다. 노비 문서를 펼쳐 보이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안에 노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886년 노비 세습제가 없어지면서 조정에서 종을 풀어주라고 했어요. 노비들에게 노비문서를 나눠주면서 집에서 나가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노비들이 울면서 호소했죠. 제발 내쫓지 말아달라고. 집에서 같이 살고 싶다고. 그들은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일부는 무서워서 이렇게 노비문서를 가지고 가지 않았고요....

왜 노비들은 자유를 준다고 했는데도 싫어했을까. 구속된 노예의 삶을 오히려 바랐다니. 큰 충격이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비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취재 결과, 전라도에서 노비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주로 강가에서 버드나무를 이용해 도시락도 만들고 함지도 만들어 생활하는 고리백정, 양수척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구의 30~50%가 노비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사회의 다수였다니. 1886년 노비 세습제가 사라졌지만, 많은 노비들에겐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게 두려웠다. 땅도, 돈도,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갈 데가 없는 노비들은 강가로 몰려들었고, 강가에 버려진 땅들을 개척해 살았다. 자유 노비들은 혼자일 때는 힘이 없었지만, 이들이 뭉치자 새로운 사회 세력이 됐다. 나주 영산강변 궁삼면 농민운동 사건을 비롯해 1897년 목포 개항과 부두노동자 쟁의, 1920년대 소작쟁의,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시대와 무대를 확장하면서 근현대사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이 『타오르는 강』이었다. 처음 1975년 『전남매일신문』에 「전라도 땅」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이 아닌 실록 형식으로 연재하다가 중단됐고, 소설로 개작해 1980년 4월부터 『월간중앙』에 5개월간 연재되다가 다시 중단됐다. 1987년 창비에서 7권의 대하소설로 간행된 뒤, 2002년 두 권을 추가해 총 9권으로 소명출판사에서 완간됐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은 나주 영산강을 배경으로 노비 출신자들이 궁삼면 농민운동을 비롯해 근현대사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핍진하게 그렸다. 나주 양진사댁에서 대대로 종살이를 해온 웅보와 대불이 형제는 1886년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자 영산강 지류 새끼내에 터를 잡았다. 다른 노비들도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마을을 형성했다. 하지만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의 땅이 몰수되자, 이들은 땅을 되찾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시작하는데.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의 의미나 특징을 말해달라.

“소설 주인공들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없고 전부 노비들이고, 리더만 몇 사람 있을 뿐이다. 노비들은 뭘 먹고 입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노비들 모습과 풍속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노비에 대한 책이 거의 없어서 조선사나 실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를 참고했다. 궁삼면 농민운동의 경우 관련 논문이 많았다. 아울러 토박이말, 향토어를 최대한 구사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나주 영산강변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문화를 집대성하려고 시도했다.”

―향토어와 토속어가 작품 속에서 잘 살아 있는데.

“1970년대 TV를 통해서, 미국으로 망명 간 작가 솔제니친이 중학생 아들과 함께 슬라브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걸 보게 됐다. 감탄했다.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확산자가 돼야 한다. 저 역시 소설가가 된 뒤 장터를 많이 돌아다녔다. 강진장, 함평장, 영암장, 나주, 목포.... 두루 돌아다니면서 듣고 메모했다. 노트를 만들어 주인공의 출신과 직업에 따라 사투리를 취재해 소설에 의도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우리 땅에 묻혀버린 언어를 발굴하고 자주 써야 한다. 작가는 언어의 생명력을 쥐고 있다.”

―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법이나 원칙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리얼리즘은 끝났다거나 지금 리얼리즘을 붙들고 있어봤자 뭐가 나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여전히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SF나 지나친 관념 소설보다는 실제 삶을 통해서 뭔가 의미를 찾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제가 살고 있는 동시대성과 삶의 현장성에서 문제를 찾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 가급적이면 공간을 우리 지역을 넘어서지 말자고 생각한다. 제가 살고 있고 가장 잘 아는 공간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다. 아울러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시대의 언어를 놓쳐선 안 된다. 소설을 쓸 때마다 향토어, 토박이말을 살려 내려고 노력한다.”

―시를 쓸 때는 어떠한지.

“관념시는 잘 쓰지 않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를 읽어보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더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한다. 시는 언어유희를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현실을 보되 조금 정제된 언어를 쓰려 한다. 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구체적인 언어를 많이 쓰고 싶다.”

그는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순천대 및 광주대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2006년 정년퇴직 후 담양군의 생오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작품 계획이 있다면.

“지금 영산강 시원인 담양 가마골부터 목포까지 영산강 현장을 답사하면서 영산강 풍류 기행시를 준비하고 있다. 벌써 몇 번 답사를 다녀왔다. 아울러 광주 이야기도 다시 한 번 써보고 싶다. 서울에 사는 광주 출신 한 사람이 5.18 이후 한 번도 광주를 찾지 않다가 처음으로 광주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요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서 집 주위를 돌고 나물을 캔다. 벌써 머위나물 쑥국을 다섯 번이나 끓여 먹었다. 조금 있으면 두릅도 나오고,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어야 한다. 아침을 먹고 이곳에 앉아서 시도 정리하고 글 쓰는 친구들도 만나기도 한다. 눈이 나빠서 소설을 읽지 못한다. 답답하면 가끔 장 구경을 다녀온다.”

중견 소설가 문순태는 잘 삭힌 홍어처럼 백발을 휘날리며 서울에서 달려온 기자에게 문학과 삶을 진솔하게 들려줬다. 정감 있고 다정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하나를 물으면 둘, 셋을. 그의 이야기가 한창 문학과 삶으로 내달릴 때, 앰프를 통해서 동네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민 여러분, 날이 매우 건조합니다. 화재가 쉽게 발생할 수 있으니 불이 나지 않도록 모두 화재 관리에 철저를 기해 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기자는 물었고 그는 이야기보따리를 친절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웹소설의 도래와 순문학의 위기, 새로운 독서 모임, 존엄한 죽음까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살지 말고 살 때까지만 살자고 한 그 말이 딱 오더라고. 내가 움직일 때까지만, 내가 살 수 있을 때까지만 살자 그 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앰프에선 산불예방을 위한 계도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으니. 화재가 나면 우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시고, 119에 신속히 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민 의식도 적극 발휘해, 사소한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 모두 산불 예방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날 오후 햇볕은 생오지를 나른하면서도 따뜻하게 이리저리 내리쬐고 있었다.

담양=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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