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보령 오너3세, 제2의 일론 머스크 꿈 이룰까
분명한 투자목표·방향성 통해 주주 설득해야
제약업계에는 속칭 '약밥'이라는 말이 있다. '약밥'은 제약업계 경력을 의미하는데 특히 영업직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다른 업종에서는 보통 '영업 몇년차'라고 얘기하지만 제약업계는 한 번 발을 디디면 다른 업종으로 이직이 드물고 의약품이라는 전문성과 특수성 때문에 제약 경력만을 의미하는 '약밥'이라는 은어가 생겼다.
제약사들도 지속적으로 신사업을 모색하지만 의약품이라는 전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약사들이 수익성 확보를 위해 뛰어드는 신사업을 보면 건강기능식품 등 영양제나 동물용의약품 같은 기존 의약품과 연장선에 있는 분야가 주를 이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령 오너3세가 꺼내든 '우주사업(CIS)' 투자 및 진출 소식은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김정균 보령 대표이사는 지난해 사장에 선임된 직후 미래 성장동력으로 '우주 헬스케어' 진출 계획을 알렸다. 상업용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미국 기업 '액시엄 스페이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난해 총 755억원을 투자해 액시엄 스페이스의 지분 0.4%를 확보했다. 보령이 액시엄 스페이스에 투자한 금액은 자기자본(5164억원)의 14.6%에 달하는 거액이다.
또 보령은 지난해 액시엄 스페이스, 우주항공 스타트업 전문 육성기관인 '스타버스트'와 함께 'CIS 챌린지'를 개최하기도 했다. 우주 헬스케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의료기기, 진단, 제약 등 다양한 목표를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지난달 열린 주주총회에서 김 대표는 영화 '마션' 속 한 장면에서 주인공 맷 데이먼이 보령을 대표하는 제산제 '겔포스'를 들고 있는 합성사진을 선보였다. 그러면서 "달에서 겔포스를 먹으면 속쓰림에 효과가 있는지 답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김 대표의 우주 헬스케어 사업에 대한 주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신약 개발 비전을 보고 투자한 주주들은 주가 하락에 날 선 질타를 보내고 있다. 익명의 한 보령 주주는 온라인 주주토론방에서 "조 단위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도 로켓 하나 발사 하기 쉽지 않은데 무슨 우주 타령이냐"며 "달에서 겔포스를 먹으면 속쓰림이 나아지는지는 궁금하면서 주주들이 속쓰린 건 왜 모르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보령의 주가는 지난해 3월 1만3000원대에서 올해 주주총회 이후 8000원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우주사업 투자뿐만 아니라 신약 개발 핵심인 자회사 '보령바이오파마'를 승계 자금 확보를 위해 매각하려는 것도 주가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앞서 지난 2월 동원산업이 보령바이오파마를 인수하려고 했지만 불발됐고 다른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기업 3~4곳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주주총회에서 보여준 김 대표의 진심에 미래 투자 가치를 인정하는 주주도 있다. 보령 주주라고 밝힌 한 블로거는 "주총에서 보여준 김 대표의 겸손하고 솔직한 모습에 액시엄 스페이스에 투자한 것이 현재보다 미래에 훌륭한 선택으로 인정받을 것으로 믿는다"면서 "액시엄 투자 배경을 들어보니 마냥 가능성이 낮은데 무턱대고 투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투자도 부채가 아닌 이익금으로 진행하는 만큼 보령은 견조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서는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글로벌 제약산업에서는 우주 헬스케어 사업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도 지난달 민간 우주탐사 기업 스페이스X와 함께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이오의약품 연구 계획을 발표했다. 머크는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고순도화, 아스트라제네카는 신규 약물전달기법, 일라이릴리는 당뇨병치료제 등을 우주에서 연구개발 중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우주사업에 투자하는 이유는 우주공간이 미세중력으로 의약품 연구개발에 유리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구에서는 중력으로 인해 바이오의약품 신약 개발에 필수적인 단백질 결정화 과정에서 불균일한 결정이 생기지만 우주에서는 중력이 거의 없어 균일한 단백질 결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미국 바이오 스타트업 '마이크로퀸'은 지난해 11월 우주에서 진행한 동물실험으로 난소암과 유방암 치료 신규 파이프라인을 발굴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처럼 글로벌 제약사들도 우주사업에 속속 투자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령에 부정적인 이유는 사업적인 측면에서의 불분명한 요소들 때문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우주에서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약 개발을 통해 기업 가치와 수익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보령은 우주에서 겔포스의 효과를 입증할 경우 회사에 돌아오는 이점은 무엇인지 등 우주사업에 투자하는 명목이 명확하지 않다.
일론 머스크가 전자결제 기업인 페이팔을 매각하고 2002년 스페이스X를 설립하면서 우주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저렴한 로켓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2020년 민간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렸다.
만약 우주 헬스케어 산업 투자에 성공한다면 김 대표는 국내에서 '제2의 일론 머스크'로 떠오르겠지만 실패한다면 막대한 손해를 남긴 경영자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주사업 투자에 대한 목표와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성난 주주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권미란 (rani19@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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