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를 샀다” SK 과거·현재·미래를 만든 두 형제
2023. 4. 19. 06:31
SK, 창업 70주년 맞아 250개 어록 일화와 담은 어록집 발표
섬유로 시작해 정유·에너지·정보통신·반도체·바이오를 아우르는 재계 서열 2위로
1953년 스물여덟 살의 한 청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잿더미 속을 헤집는다. 그가 잿더미 속에서 모은 것은 기계 부품이었다. 청년은 이 부품으로 직기 15대를 조립해 직물 회사를 세운다.
직기 15대로 시작한 회사는 창업 5년 만에 공장 5개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한다. 70년이 흐른 지금은 정유·에너지·정보통신·반도체·바이오를 아우르는 재계 서열 2위 SK로 성장했다. SK의 성장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삼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SK그룹은 창립 70주년을 맞아 최종건 창업 회장과 동생 최종현 선대 회장의 어록집 ‘패기로 묻고 지성으로 답하다’를 발간했다. 250개의 어록과 일화가 담긴 이 책에는 경영 환경 변화와 사업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두 형제 경영인의 도전과 고민이 담겨 있다. 개인의 통찰력과 사업보국에 대한 사명감, 기업가로서의 시장 전략과 일찍부터 시작한 인재 경영까지 엿볼 수 있다.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는다”
-최종건 회장, 1953년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며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 회장이 일하던 선경직물 공장은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제1공장과 2공장은 피폭으로 완파됐고 기숙사는 반파된 상태였다. 그는 나사못 하나까지 소중히 추려 모았다. 잿더미 속 부품을 주워다 직기를 재조립했고 15대로 회사를 새로 일으켰다. “공장을 재건하면 마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기업은 고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가야 한다”
“남보다 싼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최종건 회장, 1954년 한국 최초 세탁해도 줄지 않는 ‘닭표 안감’ 개발 과정에서
최종건 선대 회장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전쟁 직후 소비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무엇이든 대충 만들어 내놓아도 잘 팔리던 때도 그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품질에 대한 우수성과 소비자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고 생산 과정에서 허투루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뿐만 아니라 기술 혁신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세탁해도 줄지 않는 안감이 탄생했다.
“우리가 살길은 어디까지나 경제 발전에 있고 그 유일한 활로는 수출밖에 없다”
-최종건 회장, 1961년 박정희 의장 보고에서
1995년 그가 개발한 닭표 안감은 시장을 석권한다.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하자는 그의 경영 철학은 매 순간 빛을 발했다. 1962년에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새겨진 인견 직물을 한국 최초로 수출했다. 다음 목표는 섬유 사업의 수직 계열화였다.
1969년 원사 공장을 완공해 수직 계열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마지막 꿈은 화학 섬유 원자재인 정유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1973년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합작한 선경석유를 추진했지만 1차 석유 파동으로 연기되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47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직 계열화의 꿈은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이어 받았다.
“나중 일을 생각하면 싸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샀기 때문이다”
-최종현 선대 회장,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 당시.
최종건 회장이 개척자였다면 최종현 회장은 기획자였다. 그는 곧바로 ‘선경 5개년 계획’을 마련, 적자였던 선경직물을 1971년 흑자로 전환시켰다. 정부의 수출 장려 정책을 이용해 차관을 도입해 악성 부채를 일시 해결한 것을 시작으로 원사 직수입을 추진하고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립을 계획했다. 최종현 회장은 SK의 도약을 이끈 역사적인 인수·합병(M&A)을 하나씩 이뤄 나갔다.
특히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하며 섬유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제2차 석유 파동으로 대한석유공사 민영화가 추진됐을 때 당시 재계 10위권에 높은 부채 비율 등 열악한 재무 구조를 가진 선경이 인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옵션이었다.
SK는 1991년 울산콤플렉스의 완공했고 1996년 제5석유정제시설을 완공하면서 원유 정제 능력이 하루 생산 81만 배럴로 늘어나 세계 최대 정유 공장으로 부상했다. 유공 인수 후 회의 석상에서 한 직원이 다음 신규 사업에 대해 물었다. 그때 최 회장은 “반도체와 이동통신”이라고 밝혔다. 그의 시계는 언제나 남보다 10년을 앞섰다.
최종현 회장은 에너지·화학에 편중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해소하고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그룹 내에 5개 정보통신 회사를 설립해 이동통신 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그룹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기업은 시대를 반영한다. 오늘의 기업은 20세기가 만든 것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예측하고 미리 대응해야 한다. 세계적인 경제 논리와 한국적인 정치 논리를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한국 기업의 앞날이 달려 있다”
-최종현 선대회장, 1999년 ‘일등 국가가 되는 길’에서
그가 30년을 내다보고 과감히 투자했던 반도체·바이오·배터리는 SK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성장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우리에게는 대단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 거대한 시장이 생기니까”
-최종현 선대 회장.
시장을 읽는 눈도 탁월했다. 사업 초기부터 ‘글로벌화’를 목표로 뒀다. 최종현 회장은 한국 기업에 중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선경은 1988년부터 중국에 지사를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등 각종 체육 행사를 지원해 중국 각계각층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1990년에는 SKC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방된 지역인 푸젠성에 인데센그룹과 비디오카세트테이프 합작 공장을 세웠다.
그 결과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1991년 2월 중국 베이징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했다. 이는 대한민국 대기업 최초로 이뤄진 일이었다.
“유능한 기업가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최종건 회장의 경영 철학
두 기업인은 창업 초기부터 인재 중심의 경영을 강조했다. 특히 최종현 회장은 고교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장학퀴즈’에 제작 비용 일체를 후원했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평생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 재단은 학생들에게 5년간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최 회장의 사재였다. 그가 출국하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해주는 말은 “마음에 씨앗을 심어라”였다.
회사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종현 회장은 직원의 능력과 인격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취임 후부터 계열사 사장에게 결재권을 위임하며 서류에 회장 결재란을 두지 않았다. 1970년대 말에는 출퇴근 카드도 없앴다. 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업 환경 변화에 따라 경영 시스템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75년 한국 기업 최초로 연수원을 개원하고 4년의 연구 끝에 1979년 선경경영관리체계(SKMS)를 완성해 전 직원에게 공유했다. 그의 혁신적인 경영 시스템이 SK의 기업 문화와 인재 경영의 토대가 됐다. “기업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SK의 사회 공헌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최종현 선대 회장, 1980년 전경련 강연 중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섬유로 시작해 정유·에너지·정보통신·반도체·바이오를 아우르는 재계 서열 2위로
1953년 스물여덟 살의 한 청년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잿더미 속을 헤집는다. 그가 잿더미 속에서 모은 것은 기계 부품이었다. 청년은 이 부품으로 직기 15대를 조립해 직물 회사를 세운다.
직기 15대로 시작한 회사는 창업 5년 만에 공장 5개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한다. 70년이 흐른 지금은 정유·에너지·정보통신·반도체·바이오를 아우르는 재계 서열 2위 SK로 성장했다. SK의 성장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삼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SK그룹은 창립 70주년을 맞아 최종건 창업 회장과 동생 최종현 선대 회장의 어록집 ‘패기로 묻고 지성으로 답하다’를 발간했다. 250개의 어록과 일화가 담긴 이 책에는 경영 환경 변화와 사업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두 형제 경영인의 도전과 고민이 담겨 있다. 개인의 통찰력과 사업보국에 대한 사명감, 기업가로서의 시장 전략과 일찍부터 시작한 인재 경영까지 엿볼 수 있다.
“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는다”
-최종건 회장, 1953년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며
“기업은 고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가야 한다”
“남보다 싼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최종건 회장, 1954년 한국 최초 세탁해도 줄지 않는 ‘닭표 안감’ 개발 과정에서
최종건 선대 회장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전쟁 직후 소비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무엇이든 대충 만들어 내놓아도 잘 팔리던 때도 그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품질에 대한 우수성과 소비자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고 생산 과정에서 허투루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뿐만 아니라 기술 혁신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세탁해도 줄지 않는 안감이 탄생했다.
“우리가 살길은 어디까지나 경제 발전에 있고 그 유일한 활로는 수출밖에 없다”
-최종건 회장, 1961년 박정희 의장 보고에서
1995년 그가 개발한 닭표 안감은 시장을 석권한다.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하자는 그의 경영 철학은 매 순간 빛을 발했다. 1962년에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새겨진 인견 직물을 한국 최초로 수출했다. 다음 목표는 섬유 사업의 수직 계열화였다.
1969년 원사 공장을 완공해 수직 계열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마지막 꿈은 화학 섬유 원자재인 정유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1973년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합작한 선경석유를 추진했지만 1차 석유 파동으로 연기되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47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직 계열화의 꿈은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이어 받았다.
“나중 일을 생각하면 싸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샀기 때문이다”
-최종현 선대 회장,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 당시.
최종건 회장이 개척자였다면 최종현 회장은 기획자였다. 그는 곧바로 ‘선경 5개년 계획’을 마련, 적자였던 선경직물을 1971년 흑자로 전환시켰다. 정부의 수출 장려 정책을 이용해 차관을 도입해 악성 부채를 일시 해결한 것을 시작으로 원사 직수입을 추진하고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건립을 계획했다. 최종현 회장은 SK의 도약을 이끈 역사적인 인수·합병(M&A)을 하나씩 이뤄 나갔다.
특히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하며 섬유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제2차 석유 파동으로 대한석유공사 민영화가 추진됐을 때 당시 재계 10위권에 높은 부채 비율 등 열악한 재무 구조를 가진 선경이 인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옵션이었다.
SK는 1991년 울산콤플렉스의 완공했고 1996년 제5석유정제시설을 완공하면서 원유 정제 능력이 하루 생산 81만 배럴로 늘어나 세계 최대 정유 공장으로 부상했다. 유공 인수 후 회의 석상에서 한 직원이 다음 신규 사업에 대해 물었다. 그때 최 회장은 “반도체와 이동통신”이라고 밝혔다. 그의 시계는 언제나 남보다 10년을 앞섰다.
최종현 회장은 에너지·화학에 편중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해소하고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그룹 내에 5개 정보통신 회사를 설립해 이동통신 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그룹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기업은 시대를 반영한다. 오늘의 기업은 20세기가 만든 것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예측하고 미리 대응해야 한다. 세계적인 경제 논리와 한국적인 정치 논리를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한국 기업의 앞날이 달려 있다”
-최종현 선대회장, 1999년 ‘일등 국가가 되는 길’에서
그가 30년을 내다보고 과감히 투자했던 반도체·바이오·배터리는 SK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성장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우리에게는 대단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 거대한 시장이 생기니까”
-최종현 선대 회장.
그 결과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1991년 2월 중국 베이징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했다. 이는 대한민국 대기업 최초로 이뤄진 일이었다.
“유능한 기업가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최종건 회장의 경영 철학
두 기업인은 창업 초기부터 인재 중심의 경영을 강조했다. 특히 최종현 회장은 고교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장학퀴즈’에 제작 비용 일체를 후원했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평생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 재단은 학생들에게 5년간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최 회장의 사재였다. 그가 출국하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해주는 말은 “마음에 씨앗을 심어라”였다.
회사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종현 회장은 직원의 능력과 인격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취임 후부터 계열사 사장에게 결재권을 위임하며 서류에 회장 결재란을 두지 않았다. 1970년대 말에는 출퇴근 카드도 없앴다. 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업 환경 변화에 따라 경영 시스템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75년 한국 기업 최초로 연수원을 개원하고 4년의 연구 끝에 1979년 선경경영관리체계(SKMS)를 완성해 전 직원에게 공유했다. 그의 혁신적인 경영 시스템이 SK의 기업 문화와 인재 경영의 토대가 됐다. “기업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SK의 사회 공헌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최종현 선대 회장, 1980년 전경련 강연 중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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