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43. 고성 해금강 다방
몸다쳐 농사 접고 다방에 담배 공급
금강산 이름 따 1990년 4월 개업
2002년 태풍 침수 피해 입고 고비
금강산 육로 관광 효과 최대 호황
피격사건 후 고성지역 경기 침체
코로나 타격 불구 단골 덕에 장사
반평생 바쳐 올해로 34년째 영업
옛 모습 그대로 동네 사랑방 역할
“여보게나 친구, 자네가 있는 다방에서 가끔씩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눌 수 있어 참 좋아. 사랑방 같은 이곳이 늘 있었으면 좋겠어…”
고성 간성읍 간성로 36에 위치한 해금강다방의 박원철(68)·사월선(64) 부부는 오랜 단골인 친구들의 이런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로 34년째를 맞이한 해금강 다방은 지난 1990년 4월 개업했다. 지금은 건물 2층에 있지만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땐 같은 건물 지하 1층에 자리를 잡았었다.
고성지역에서 향로봉, 진부령보다 눈이 더 많이 내리는 간성읍의 산골짜기 마을 탑동리에서 나고 자란 박 씨는 지난 1981년 아내 사 씨를 만나 오순도순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시골에서 순박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던 부부에게 박 씨의 사고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농사일을 하다 크게 다친 박 씨는 서울 대학병원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고 난 후 더 이상 몸 쓰는 농사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는 크게 절망했었다. 하지만 그의 두 어깨에는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다. 그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마을에 작은 가게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성장하는 자식들의 교육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동네 구멍가게의 수입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마냥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수입을 극대화해야 했다. 마침내 그는 직접 고객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이 간성읍에서 한창 번성기를 누리던 다방에 담배를 공급하는 일이었다. 간성읍 시내에는 10개 이상의 다방이 성업 중이었고 다방마다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담배 공급으로 수익이 늘어난 그에게 다방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최고의 사업 아이템으로 보였다. 마침내 부부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 ‘금강다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방을 개업하려 했으나 ‘금강농협’과 비슷해 앞에 ‘해’자를 덧붙여 ‘해금강다방’이라 이름 짓고, 지난 1990년 4월 간성읍에 다방을 개업했다.
박 씨는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커피 한잔 가격이 400원이었는데 지금은 4000원이니까… 세월이 많이도 지났다. 우리 아이들 모두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35살에 다방을 개업한 박 씨는 다방과 함께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68세,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박 씨는 “얼마 전 40대가 된 군부대 대대장이 이곳에 왔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젊은 장교 시절 이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애인이 없었던 젊은 군인들이 외출을 하고 싶을 때 우리 다방에 부탁을 하곤 했다. 그러면 나이가 비슷한 여직원을 보내 여자 친구 노릇을 해 면회 신청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이곳에 들러 차를 마시고 간다고 했다. 그에게 해금강다방은 청춘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방을 오픈하고 10여년은 장사가 아주 잘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도 농민과 어민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고성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박 씨는 “고성은 IMF 경제 위기가 왔을 때 잠깐 힘들었지만 그 다음해에 고 정주영회장의 소떼 방북사건과 이어진 금강산육로관광으로 최대 호황기를 맞이했다. 남북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으니까”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업에는 고비가 찾아오는 법, 박씨의 사업도 천재지변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다. 2002년 8월 대한민국을 강타한 태풍 루사는 전국적으로 4조4730억원의 큰 재산피해를 발생시켰다. 고성이 가장 큰 피해 지역 중 한 곳이었다. 고성군의 논밭은 모두 물에 잠기고, 주요 도로도 대부분 유실됐다. 해금강다방이 지하에 있던 터라 모든 것이 물에 잠겨 하나도 못 건졌다. 그 때 참 눈앞이 캄캄했던 부부는 한 번의 큰 고비를 넘긴 후 다방을 건물의 2층으로 옮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금강산관광이 시작되면서 고성의 경기는 최대 호황기를 맞이했다. 처음에 해로를 통해 배를 타고 이동했던 금강산관광사업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사업자의 자금난이 겹쳐 한 때 관광객이 감소하는 등 중단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금강산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공사의 진전으로 2003년 2월부터 육로 관광이 시작됨에 따라 금강산관광사업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금강산 육로 관광의 길목에 있던 고성군도 이때 최대의 호황을 맞았다. 금강산관광 시작 6년만인 2005월 6월 누적 관광객 수가 100만명을 넘어서고 2008년 8월 2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2008년 7월 11일 북한군에 의한 우리 측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광이 전격 중단됐다. 이후 고성지역의 상경기도 급격히 냉각되고 말았다. 간성읍에 성행하던 13곳의 다방은 하나 둘 폐업하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사월선 씨는 “금강산 관광의 중단과 함께 지역 경기가 서서히 침체되기 시작했다. 장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간 것이 후회가 너무 크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방을 개업한 후 박원철 사월선 부부는 종업원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그런 평판은 손님들에게도 전해져 다른 다방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도 계속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됐다. 하지만 2019년부터 3년간 지속된 코로나 팬데믹은 대면영업을 주로 하던 다방에 큰 타격을 입혔다. 자주 찾던 단골 고객들도 발길을 끊어 버렸다. 사 씨는 “코로나 이전엔 종업원이 10명 정도 있었지만 이후 모든 종업원이 떠났다. 문은 열어 두고 있었지만 차를 마시러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날이 태반이었다”며 코로나 시기에 홀로 다방을 지키는 날이 아주 많았다고 했다. 이어 “가게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30년 넘게 꾸려온 이 일을 접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기가 없어지면 우리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사는 날까지 다방 문을 닫지 말아 달라.” 이렇게 말하는 단골들 덕에 가게 문을 닫을 순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친구들이 가끔 들러 다방에서 제일 비싼 쌍화차를 마시기도 한다. 쌍화액, 땅콩, 대추, 해바라기씨, 미숫가루, 참깨, 계란 노른자 등을 넣어 그 옛날 전통 쌍화차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요즘 카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이곳을 방문하며 재밌어한다고 했다.
2002년 태풍 루사 이후 옮겨와 단 한 번도 리모델링을 하지 않아 2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제는 동네 사랑방이 돼버린 해금강다방, 박원철 사월선 부부는 청춘을 이 다방과 함께했다. 고성 주민들과 함께 해 온 해금강다방은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이다. 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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