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대표 출신도 공단 모범생도… 부동산 경험없는 2030이 피해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전세 사기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 절차 중단’ 지시를 내리면서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대책 마련이 시작됐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보유 중인 피해 주택을 당분간 경매로 넘기지 않고, 국토교통부도 금융기관에 경매 매각 연기를 강력 요청하기로 했다.
이번 ‘인천 미추홀 전세 사기’는 일명 ‘건축왕’ 남모(62)씨가 총 2864가구, 약 2700억원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사건이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작년 8월 무렵이다. 이후 정부는 9개월 동안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가, 최근 피해자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자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 대책에 대해 “경매 중단은 ‘산소호흡기’ 수준이고, 대부분 2030세대인 피해자들이 길거리에 내몰리지 않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최근 ‘전세 사기’ 급증에는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 정책도 영향을 준 만큼,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며 “피해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재난 상황에 준하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세 사기 왜 터지나
최근의 전세 사기 피해는 빌라에 세 들어 사는 20·30대 청년층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규격화된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비슷한 지역이라도 건축 연도나 옵션, 내부 구조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아 적정 시세를 산출하기 쉽지 않다. 또 매매 가격 대비 전셋값이 높아,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 투자’로 많게는 수천 채의 집을 사들이며 전세 사기를 벌일 수 있다. 여기에 건축업자와 공인중개사, 부동산 컨설팅 업체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미추홀 건축왕’ 전세 사기의 경우 건축업자 남모씨는 빌라와 소규모 아파트를 지은 후 이를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최대 한도로 돈을 빌렸다. 이 돈으로 다시 공동주택을 신축하는 방법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총 2800여 채를 지었다. 이렇게 담보 대출로 근저당이 과도하게 설정돼 있는 집에 전세를 들어가면, 보증금을 못 돌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경매 정보 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최근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경매 낙찰가율은 50~60%에 그친다.
◇”2030 피해자, 재기 기반 만들어줘야”
정부는 지난 2월에도 전세 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대체 거주지를 찾거나 기존 전세 대출 연장을 위한 저리 대출을 제공하고, 피해 빌라를 경매로 낙찰받아도 청약에 불이익이 없도록 한 게 골자였다. 이번에 정부가 추가로 내놓은 ‘경매 중단’ 조치는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요구 중 하나다. 피해자들은 경매 시 우선권 부여와 대출 허용도 요구하고 있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과도한 지원을 할 경우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매 중단 조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도 빌라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은 낮아 보증금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전세 사기 피해자로 지난 17일 극단 선택을 한 A(31)씨는 최연소 육상 국가 대표 출신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해머 던지기 종목에서 5위에 올랐다. A씨는 2021년 9월 보증금 9000만원에 아파트 전세 재계약을 했다가 아파트가 경매에 넘겨지는 바람에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앞서 지난 14일에는 B(26)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B씨는 고교 졸업 후 남동공단 등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전세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에는 30대 C씨가 “정부 대책이 굉장히 실망스럽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숨졌다.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도 오피스텔 250여 채를 소유한 임대인이 파산해, 피해자 수십 명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피해자들은 “동탄·병점·수원 등에 오피스텔 250여 채를 소유한 임대인 부부가 최근 세입자들에게 ‘세금이 체납돼 전세금을 돌려주기 어렵다, 소유권을 이전해 가라’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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