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다’는 건 착각… 사실이라 믿던 모든 걸 의심하라
시리아 연인들 ‘막장 멜로’ 같더니
오독이 빚은 착각… 충격 반전
현실 전복하는 연극적 쾌감 충만
“난 그저 너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하딜.”
‘유세프’(김세환)가 ‘하딜’(김유림)에게 질척이며 매달린다. 가장 친한 친구 ‘아메드’(정원조)가 오랫동안 사귀어온 애인 ‘하딜’에게 청혼할 예정인 저녁, 그걸 알면서도 유세프는 하딜을 붙잡으려 한다. 하딜의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다.
“하딜, 네가 아메드를 사랑하는 거 알아. 이것만 말 할게. 한 번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거야.”
친구의 뒤에서 연인을 가로채려는 남자라니, 이 무슨 TV 아침 드라마 같은 전개인가. 게다가 유세프에겐 오래 사귄 애인 ‘바나’(이다해)가 따로 있다. 청춘남녀 네 명의 사랑의 작대기가 격렬하게 얽히고 엇갈린다.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과장된 몸짓과 대사에 객석에선 끊임없이 폭소가 터진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키스’(연출 우종희)의 무대는 미묘하게 모든 것이 어긋나 있다. 배경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내전으로 황폐해졌을 도시. 네 젊은이가 평온하게 사랑 싸움에만 집중하는 게 가능한 걸까. 게다가 바나는 뜬금없이 “누군가와 키스했어”라고 말하고, 줄곧 기침을 하던 하딜은 갑자기 쓰러진다.
네 젊은이의 사랑싸움은 공연 시작 뒤 40분쯤이면 끝난다. 객석 조명이 들어오고 배우들이 인사하자,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뜨려는 관객도 있다. 그때 연출가가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 자리 잡고 레바논 난민 캠프에 있는 시리아 여성 희곡 작가와 영상통화를 연결한다. 그리고 연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연출자는 왜 희곡에 쓴 ‘총소리가 들린다’는 지문을 무시했을까. 바나가 말한 ‘키스’란 비인간적 인권 탄압이 공공연한 시리아에서 어떤 의미일까. 내전에 생화학 무기까지 쓰였다는 이 나라에서 기침을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극중극 형식으로 그 비밀들이 밝혀질 때, 맥락에 무지한 채 텍스트를 오독해서 빚어진 기막힌 반전이 드러난다. 그리고, 연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실 혹은 진실이라고 믿었던 눈앞 무대 위 세계의 모든 것을 단박에 전복시키고 무너뜨리는 엄청난 연극적 쾌감이 있는 작품. 안전한 거실 소파에 앉아 게임처럼 중계되는 전쟁 뉴스를 보며 ‘다 알고 있다’ 말하는 건 위험한 오만이라고, 가끔은 현장 르포 정도 봐주면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 큰 착각이라고 말한다. 이 연극은 전기 충격을 당한 듯한 격렬한 정신적 통증으로 만연한 오만과 착각을 일깨운다.
이 극적 깨달음의 끝에서, 내전 중인 시리아를 살아가는 네 젊은이의 삶과 죽음은 왜 세상은 여전히 이렇게 아무도 원치 않는 고통으로 가득한지 묻는 거대한 질문으로 승화한다.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은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겉으로만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며, 막연한 짐작으로 사건의 맥락을 단순화하고 있는지 모른다”며 “연극 ‘키스’는 가볍게 듣고 흘리다가 누군가의 애타는 절규를 외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다.
피노체트 철권 통치 기간 삼촌을 잃은 칠레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은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이 ‘아랍의 봄’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할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실제 시리아 여배우 메이 스카프(1969~2018) 이야기에서 출발해 이 희곡을 썼다. 공연은 이달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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