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버리지 못하는 사연
쓰임이 다해 정리해야 하는데도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는 슬라이드 필름이 그렇다. 그 자료를 만들 때의 수고로움과 애정이 듬뿍 배어 있기 때문이리라.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함께 금동불상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일제 디지털 카메라로 작은 금동불상을 촬영하게 됐다. 그런데 출장 온 도쿄박물관 직원들이 플로피디스크가 가득 든 큰 가방을 메고 있어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플로피디스크 한 장에는 불상 사진이 겨우 서너 장밖에 들어가지 않아 그렇게나 많은 분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오래전 슬라이드필름에 비하면 그건 양반이었다. 큰 맘 먹고 정리하려고 필름을 펼쳐보니 이 한 장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옛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내 대학원 시절만 해도 유물 사진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오거나 문화재 전문 사진 작가가 촬영한 미술사 도록을 또 촬영해서 슬라이드를 만들어야 했다. 귀한 미술사 도록은 도서관 밖으로 대출이 허락되지 않아 열람실 한쪽에 텅스텐 조명을 설치하고 촬영했는데, 전구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땀으로 뒤범벅이 될 수밖에. 시간에 쫓긴 날에는 필름 현상이 가장 빨랐던 충무로로 달려가 슬라이드로 만든 뒤 발표장으로 헐레벌떡 뛰어간 기억도 있다.
그토록 절실했고 소중했던 슬라이드 필름과 환등기는 이젠 박물관 전시물이 됐다. 지금은 화질이 좋은 유적과 유물 사진을 문화재청 국가 문화 유산 포털과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서 손쉽게 받을 수 있다. 슬라이드 사진을 정리하면서 지나온 내 흔적을 되돌아보았다. 경주 남산 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만났던 이끼 낀 마애불,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옛 절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마주했던 무너진 탑과 주춧돌, 법당 살림집에서 우연히 찾아낸 신라 비로자나불…. 오래전 내 가슴을 뛰게 했고 열정을 품게 했으며 고락(苦樂)을 함께한 녀석, 슬라이드! 나를 참 많이 알고 있는 이 친구들을 이번에도 놓아주지 못할 게 뻔하다. 오래된 LP판이나 수첩, 카세트테이프,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버리지 못하는 사연을 하나씩은 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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