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봄꽃들과 현수막

2023. 4. 18.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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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느닷없이 그가 생각났을까.

전화로 용건을 말하면 좋겠다는 내게 그는 말했다.

그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듯 덤덤히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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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느닷없이 그가 생각났을까. 애잔한 모성을 내게 보여준 사람. 그는 도서관에서 진행하던 글쓰기 강좌의 수강생이었고, 첫날 이후 자취를 감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전화로 용건을 말하면 좋겠다는 내게 그는 말했다. 꼭 만나야 한다고. 만나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약속한 날, 나는 과로로 인한 미열에 시달리며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도대체 만나서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일까. 이런저런 의구심으로 사뭇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는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어정쩡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보내왔다. 나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고 그가 있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물었다. 왜 수업에는 나오지 않은 거예요? 내 물음에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한데 말하는 도중에 자꾸만 한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간의 삶이 편하지 않았던 듯 고단함이 온몸에 더께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딸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침 집안 형편과 상황에 맞는 특별전형이 있었던 모양이다. 딸의 자기소개서 때문에 바쁜 나를 불러내다니. 뜻밖의 말에 나는 좀 맥이 풀렸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듯 덤덤히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꺼내놓았다. 남편이 갑자기 거액의 사기를 당한 뒤 심화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바람에 모든 일을 자신이 떠맡게 되었는데, 그 짐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난마로 뒤엉킨 일들을 하나씩 풀어야 하지만 어디에다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고, 도움을 주는 곳도 없다고 했다. 그 역시 마음의 병 때문에 몸도 성치 않다고 고백했다. 그는 엄살도 부리지 않았고 연민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풀어내는 그이의 고백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그는 자신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엄마로서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조금 울컥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엄마이지만 뭐라도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일러주었다. 나 역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느닷없고 뜬금없이 그가 생각난 것은. 가로변 주변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꽃들을 보며 걷다가, 그 봄꽃들을 장막처럼 두르고 있는 온갖 정치적 현수막들에 눈이 갔고, 그 날 선 언어들이 미늘처럼 그를 기억 속에서 끌어냈을 것이다. 정말,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서로 힘이 돼주며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정치이고, 정치의 목적이 아닐까. 그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일들은 잘 해결됐는지, 딸은 엽렵하게 제 일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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