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유튜브, 디지털 기사… 펜·라디오·방송기자 '1인 3역'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CBS 정다운 기잡니다. 오늘 주요 뉴스 전해드립니다.” 지난 11일, 서울 양천구 CBS 사옥 3층 표준FM부조정실. 오후 5시30분을 알리는 시보가 울리고 ‘정다운의 뉴스톡530’ 시그널이 끝나자 정다운 기자가 힘 있고 단정한 어조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조금 앳되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앵커처럼 확 바뀌었다. 이날 뉴스는 산불 소식부터 도·감청 사태, 기준금리 유지 등 딱딱한 내용이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 기자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원고를 읽는 사이사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에선 여유마저 느껴졌다.
정다운 CBS 기자는 지난해 9월 말부터 ‘정다운의 뉴스톡’을 진행하고 있다. 진행 경력이 꽤 있는 기자가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이제 막 6개월을 넘긴, 새내기 앵커다. CBS는 지난해 하반기 저녁뉴스를 개편하며 오랜만에 앵커를 기자로, 그것도 30대 초반의 젊은 기자로 뽑았다. 당시 그가 9년차였으니 CBS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정다운 기자는 “앵커 자원을 키워야 한다는 회사 방침 아래 앵커 교육을 받겠다고 자원했고 그 와중에 저녁뉴스 프로그램 개편 논의가 나왔다”며 “함께 교육을 받던 사람들이 다 지원을 했는데 그 중에 뽑히게 됐다. 당시 저녁뉴스를 영상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젊은 기자로 뽑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 기자를 앵커로 발탁한 건 CBS로서도 모험이었지만 한편으론 정 기자에게도 도전이었다. 지난 2014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2019년 CBS로 이직 후 법조팀에서 3년, 산업부에서 8개월가량 일했던 그는 지난해 앵커로 뽑히며 처음으로 내근직을 경험하게 됐다. “지루할 타이밍이 됐던 찰나”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된 셈이다. “막상 해보니 뉴스 제작과 취재는 완전히 달랐어요. 기자는 보통 개인 취재를 하니까 자영업자라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뉴스 제작은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조율하는 협업의 과정이더라고요. 조명 하나를 바꾸더라도 물어봐야 하고, 마이크 음질이 이상해도 물어봐야 하고.” 정 기자는 “물어봐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제야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직장 생활은 과연 어떨지, 쉼 없이 일하는 정 기자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유튜브 영상, 실험 또 실험
“여기도 따라오시나요?” 오전 9시50분, CBS 사옥 2층 보도국 구석 화장실로 향하던 정 기자가 웃으며 물었다. 10여분 전 출근한 그는 화장을 하러 가는 참이었다. 여름 빼곤 선크림조차 안 발랐던 그는 앵커를 맡으면서 일처럼 화장을 하게 됐다. 저녁뉴스를 유튜브 영상으로 내보내는데, 개인 채널이면 몰라도 회사 채널에서 추레한 모습을 보이기가 조금 그렇다고 했다.
그의 업무는 보통 오전 10시쯤 시작한다. 핵심은 오후 5시30분 저녁뉴스 진행이지만 그렇다고 느지막한 오후에 출근하지는 않는다. 사실 출근 전부터도 할 일이 많다. 아침 시사 프로그램에 어떤 내용들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고, 최근엔 일손이 부족한 회사 사정으로 환경부 출입도 병행하게 되면서 오전 9시쯤 정보보고를 올리고 회사로 나오고 있다.
화장을 끝낸 그가 “늦었다”며 노트북을 들고 서둘러 보도국 뉴스센터로 향했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다정한 뉴스가 살아남는다(이하 다정한 뉴스)’ 녹화 날이다. 오전 11시 녹화를 위해 10시부터 관련 회의가 잡혀 있었다. 뉴스센터엔 벌써 조명, 카메라, 마이크를 세팅하는 제작진이 가득했다. 뉴스센터를 단장한 지 얼마 안 돼 조명과 카메라를 조정하고 또 조정하며 깔끔한 화면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정다운 기자와 함께 다정한 뉴스를 진행하는 조태임 기자가 뉴스센터로 들어선 후엔 본격적인 원고 조율이 시작됐다. 가욋일이다 보니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는 터라 인사말 등 세밀한 부분은 현장에서 맞춰 나가고 있다고 정 기자는 말했다.
얼추 준비가 끝나고 시계가 10시55분을 가리킬 때쯤 프로그램 녹화가 시작됐다. 조태임 기자가 “한 주간 쏟아지는 뉴스에 다정한 관점을 담는 다정한 브리핑”이란 멘트로 프로그램을 시작하자 그 후부턴 물 흐르듯 녹화가 진행됐다. 다정한 뉴스는 뉴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나 감정을 뉴스 노동자인 기자들이 차분하게, 상담하듯 풀어내는 프로그램이다. 유튜브용 제작 영상으로, 지난 2월28일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다만 애초 실시간으로 진행됐던 프로그램은 최근 들어 녹화방송으로 전환한 상태다. 편집 인력을 줄이기 위해 실시간으로 진행하려 했는데, 그보단 프로그램 질을 높이는 게 낫겠단 판단에서다. 초기인 만큼 실험도 계속 진행 중이다. 정 기자는 “사람들이 뭘 좋아할까 고민하면서 매주 다른 조건으로 방송을 해보고 있다”며 “배경, 조명, 마이크, 대본 등을 계속 손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방송은 먹거리가 주제였다. 양곡관리법의 대안으로 나온 ‘밥 한 공기’ 논란, 강남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등 먹거리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에 대해 두 기자가 이야기를 나눴다. 심각한 사안인데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하니 녹화를 중단하고 재촬영하는 상황도 있었다. 30분이 흘러 11시25분, 녹화가 끝나자 바로 평가 회의가 시작됐다. 마이크와 조명을 점검하는 것은 물론 방송 내용에 대해서도 열띤 의견이 오갔다. 욕심은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다보니 결과물이 아쉬워 제작진 간 개선점을 공유하고 또 공유했다. 추후 회의를 약속하며 11시55분에서야 다정한 뉴스 제작이 모두 끝났다.
생방송은 시간과의 싸움
점심을 먹은 뒤 회사로 복귀하니 벌써 저녁뉴스를 준비할 시간이다. 이날은 강릉 산불과 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지며 CT(Cross-Talk, 취재기자 연결)가 2개 잡혔다. 즉, 외부 인터뷰이를 따로 섭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평소 외부 인터뷰가 잡힐 땐 정 기자가 섭외부터 내용 조율까지 모든 걸 도맡는다.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를 정리하고 뉴스 내용을 공부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정신없이 일해야 한다.
“오늘 할 일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던 정 기자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보도국 한편 테이블에서 누군가와 회의를 시작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선배인 김성광 PD와 준비하고 있는 인터랙티브 기획 회의다.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는 사이 ‘회복적 사법’ 같은 단어가 드문드문 들렸다. “법조팀 기자 시절 친족 성폭력 피해자와 인터뷰한 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왔는데, 이 사건이 잘 안 됐어요. 결과적으로 제도적인 한계가 굉장히 컸던 사건이고, 사건 기사 하나만으로 사실 이 사람이 겪은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어서 언젠가 그걸 설명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거든요. 앵커가 좋은 점 한 가지는 ‘나와바리’가 없다는 거고 마침 선배가 그런 기획에 되게 능한 사람이라서 함께 인터랙티브 기획을 발전시켜 오고 있어요.”
다만 올해 한국언론진흥재단 기획취재 지원사업에 응모하려 했던 애초 목표는 현재 좌초된 상황이다. 인터랙티브 등 디지털스토리텔링 보도를 위해선 신문법에 규정된 일간·주간·인터넷신문이어야 하는데, CBS는 방송사고 노컷뉴스 소속으로 응모하기엔 파견 등 관련 절차가 까다로워서다. 이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CBS는 방송사지만 기자들이 주로 기사를 송고하거나 보도하는 채널은 인터넷 사이트인 노컷뉴스와 라디오 방송이다. 최근엔 뉴스 콘텐츠를 유튜브 등 영상플랫폼에 올리기 위한 제작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요구받고 있다”는 내부 구성원의 말처럼 기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고, 정 기자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펜 기자, 라디오 기자, 방송 기자 3가지 역할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오후 3시23분경 회의가 끝나자 정 기자는 바로 저녁뉴스 공부를 시작했다. 기자들이 올린 원고를 보며 앵커멘트를 수정하고, 관련 뉴스를 챙겨봤다. 이날 취재기자 연결이 예정된 도감청 의혹이 리포트로 바뀌자 “궁금한 게 많았는데 아쉽다”며 직접 담당 기자에게 전화해 관련 내용을 물어보기도 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면서 분위기는 좀 더 분주해졌다. 오프닝과 클로징 등 앵커 멘트를 소리 내 읽고 계속 수정하던 와중 방송 22분 전에 큐시트가 나왔다. 취재기자 연결이 한 번 뿐이라 방송 시간이 남을 것 같으니 리드를 더 길게 빼겠다, 원고를 좀 천천히 읽어 달라는 부탁이 오고 갔다.
오후 5시25분, 완성된 원고를 출력하자마자 정 기자는 3층으로 뛰어올라갔다. 표준FM부조정실엔 이미 제작진이 대기 중이었다. 정 기자는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아 몇 분간 준비를 한 뒤 시보를 시작으로 저녁뉴스 진행을 시작했다. 30분간의 짧은 방송이지만 방송 진행 중 조율할 것이 적지 않았다. 주로 시간 싸움이었는데, 시간이 남을 것 같다며 걱정하더니 오히려 후반부로 가서는 시간이 부족해 ‘어텐션 뉴스’ 코너를 짧게 마무리하며 57분 30초에 맞춰 생방송을 끝냈다.
방송이 끝났다고 업무도 끝난 건 아니다. 요즘은 라디오 방송도 유튜브에 클립 영상을 올려야한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그는 썸네일 제목 작업을 시작했다. 조회 수가 안 나와 고민 중인 그는 어떤 제목이 좋을지 씨름하다 10여분 만에 완성된 제목을 디지털제작본부에 넘겼다. 그리고 드디어 오후 6시36분 회사를 나왔다.
번아웃이 왔던 열정 인간
‘퇴근했다’는 말을 쓰지 않은 건 정 기자가 이 시각, 퇴근해 집으로 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풋살대회 연습 날이었다. CBS는 오는 5월6일 한국기자협회 여성회원 풋살대회에 참가한다. 정 기자는 ‘풋살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후배의 말에 덜컥 용기를 내 선후배를 간곡히 설득, 8명으로 겨우 풋살팀을 꾸렸다. 직접 팀을 꾸렸으니 매주 있는 연습을 위해 경기장을 예약하고, 코치를 물색하고, 운동복을 맞추는 일도 그의 몫이다. 오후 7시를 조금 넘겨 도착한 실내 풋살장에서 그는 두 시간여 동료들과 패스, 슛 등을 연습했다.
어떻게 보면 현재 정 기자는 ‘오버 페이스’인 상황이다. 저녁뉴스 진행에 유튜브 영상 촬영, 인터랙티브 기획 준비, 풋살대회 연습까지. 그것도 모자라 그는 최근 법사회학 석사 논문도 준비하고 있다. 동행취재를 한 전날에도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시간 눈을 붙인 후 논문을 준비하다 출근했다고 했다.
“원래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었느냐”, 묻는 질문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 2년간 번아웃(burn out·소진)으로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지난 2년간 거의 바닥을 찍으며 아무것도 못 하고 지냈다고 했다. “그냥 배터리가 다 방전돼 아무것도 못하던 기간이 지난 2년이었어요. 그러다 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 지금은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올라와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마 2년 동안 못 했던 일을 좀 과하게 벌이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MBTI로 따지자면 ESTP, 즉 ‘모험을 즐기고 수완 좋은 활동가형’인 그는 앵커로서의 정체성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뼈아픈 비판에도 상처를 입기보다는 도전의식을 불태우고, 회사가 원하는 역할과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 사이에서 줄을 타며 더 좋은 뉴스는 무엇일지 고심하는 중이다.
“뉴스톡으로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건 우리 취재기자들이 이렇게 진심이고 이 정도의 취재를 거쳐 노컷뉴스 기사가 나온다는 것이었어요. 다정한 뉴스도 마찬가지에요. CBS 기자들 괜찮다, 믿고 볼만한 뉴스를 만드는 구나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언론 전체에 대해선 뭉뚱그려 불신이 큰데, 사실 기자 한명 한명은 괜찮다는 걸 보여주면 결국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꿈은 결국 살아남아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예정된 봄, 가을 개편에서 먼저 뉴스톡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우선 목표는 1년을 채우자, 그러니까 앞으로 앵커로서 6개월을 더 버티자는 겁니다. 현재 뉴스톡이 뉴스인지, 시사인지 양식이 혼란스럽다는 비판도 있고 2주 전부터 뉴스 개편 협의체도 운영 중이에요. 애초 뉴스톡의 취지가 보도국 기자들이 설 자리를 스스로 만들자는 것이었으니까 앞으로의 뉴스 개편도 그런 방식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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